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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 가지를 손에 붙들고

뽕나무 가지를 손에 붙들고

[audio:2010/2010-10-24.mp3]

성경 본문: 누가복음 19: 1-10
설교자: 김성회 전도사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기적을 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는 침이 가지고 있는 해독 성분과 침으로 안과 질환 치료가 가능한지의 논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시대라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장탄식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기적을 믿으십니까?
성도 여러분. 기적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시고 제가 강대상에 올라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 아니겠습니까?
네, 예상대로 안 웃어주시는군요. 역시 평화의교회 교인들이십니다.

제가 처음 평화의교회에 태리를 데고 나올때만 해도 저는 식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700스퀘어핏의 작은 공간에 6명의 직원이 복닥거리며 샌드위치를 팔았었습니다. 음식재료 사고 렌트내고 종업원 월급주고 그리고 남는 돈이 저희 가족이 버는 돈이었습니다. 만만한건 종업원이었고, 인건비를 절약하는 것 말고는 돈을 아낄 데가 없었습니다. 최저 임금이야 주지만, 그렇다고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었지요. 가능한 한 쥐어짜면서 일을 시켜야 했었습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사장이었겠지만, 일하던 히스패닉들이 사랑할만한 사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아낀 푼돈으로 먹고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제가 지금 다니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을 만났던 시절의 이야기를 잠깐 드릴까 합니다. 그 시절의 저는 화가 참 많았습니다. 돈은 벌고 있었지만 인생은 공허했고, 쉴새없이 어머님에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곤 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몸을 맡기고 하고 싶었던 공부를 접고 아침 9시부터 밤까지 매일같이 일을 해야 한다는 자체가 짜증이었습니다. 마땅히 기댈 데도 없었고 무엇인가를 함께 진지하게 대화 나눠볼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금의 담임목사님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마침 기독교에 대해 할 말이 많았었던 저는 이것 저것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모든 지겹고 악의에 찬 이야기들을 묵묵히 들어주시곤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조분조분 가르침도 주시고, 어떤때는 읽어보라고 책도 집어다 주셨습니다. 그런 과정과 목사님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저의 잘못된 편견이 깨지고 나자 전 은근슬쩍 예수라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이만큼 인기가 있다면 분명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습니다. 담장 너머 새 세상에 대한 동경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자석처럼 끌려가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저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또 신학대학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어떤 연예인의 어이없는 고백처럼 저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예수를 알고 따르기를 원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실 형편으로 놓고 보자면 등록금 내가면서 신학대학 다닐 팔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럴 시간도 없었습니다. 매 주 70시간을 넘게 일을하면서 신학대학원을 다닌다고 결심한 건 그냥 정신 나간 생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미 담장 너머의 세상을 힐끔힐끔 바라봤던 저에게는 그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너무나 컸습니다. 저는 담장 위로 손을 올리고 깨근발을 짚고 그 세상, 예수님이 계신 그 세상을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평화의교회 청년부의 이름이 바로 삭개오입니다. 해서 청년부원들에게 삭개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청년부 헌신예배의 의미를 살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문으로 정해봤습니다.
삭개오는 로마 정부를 위해 동네 사람들의 돈을 쥐어짜내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라는건 회계사라기보다는 세금징수원으로 이해하시는게 좋겠습니다. 그냥 세리도 아니고 세리장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랑 부대끼며 살면서도 세금을 걷을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세상은 경제 수준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삽니다. 아 저는 라캬나다에 살아요 라는 한마디면 그 사람의 경제적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한동네에 부자고 가난한 사람이 함께 모여 살았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50년 전의 시골만 해도 초가집과 기왓집이 한 동네에 공존했었지 않습니까?
아마 삭개오가 돈을 걷으러 다닐 때는 이런 풍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수금이 제대로 안 되는 집에 가면 삭개오가 당연히 싫은 소리를 했을 것입니다. “이번 달 말까지예요. 그 이상은 힘들다니까. 다음 달로 넘기면 2할이 더 붙으니 알아서 하던가.” 흉년에 이런 소리를 들으면 일하는 사람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니 이봐요. 흉년인데 어쩌라고?”사정을 했겠지요. 그래도 달라졌을 리 없겠지요. 흉년이라면 세금은 당연히 더 걷기 힘들었을 것이고, 중앙정부는 세리들을 더욱 강하게 압박했을 테니까요. 이러고 다니는데 동네에 사이좋은 사람이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여리고로 들어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시작됩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를 썼으나 키가 작아서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 오는 모습을 봤다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네의 부자이자 세리장인 사람이 체면이고 뭐고 나무에 올라갈 만큼 열성이 있었다면 군중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을 리 없습니다. 여리고는 1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던 도시라고 보는데 그 정도 크기라면 어디엔가는 틈이 있었을 것입니다. 키가 작아서 못 들어간 것이 아니라 들여보내주지 않으니까 못 들어갔다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함께 1세기 여리고의 거리로 떠나보실까요? 예수님의 모습이 동네 어귀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동네 사람들은 모여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야고보, 얼른 나와 봐. 예수님이 우리 동네 어귀에 나타나셨다는데!”
예수님이 방문하신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여리고 전체에 퍼졌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삭개오는 예외였겠지요. 세상을 깨끗하게 하러 오신 예언자를 맞이하기에 삭개오는 더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예수의 방문을 알려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너무나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뽕나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을 전혀 모른 삭개오는 평상시처럼 주판알을 튕기다가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자리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미 모두 길거리를 메우고 있었겠지요. 저기서 와! 하는 소리가 들리고 “메시아다! 그리스도다!”하는 함성이 동네를 메우자 삭개오도 눈치를 챘을 것입니다.
“뭐지? 그 예수라는 분이 우리 동네를 오신건가?” 삭개오는 신발을 꺾어 신고 밖으로 달려 나갔겠지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도로 쪽으로 가보려 했지만 사람들은 틈을 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럽다며 밀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얄밉다고 안 비켜주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예수라는 분 얼굴도 못 보겠는걸.’ 마음이 다급해진 삭개오는 주변을 살펴보고는, 마침 도로변으로 나뭇가지를 드리운 뽕나무가 보이자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틈도 없이 신발을 벗어 던지고 나무에 올랐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부족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신다는 소문을 삭개오는 들었을 것입니다. 동네에서 부자소리를 들었지만, 또 죄인 소리도 함께 들어야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 모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답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세리장의 지위였으니 그는 필경 아주 똑똑했거나 아주 모질거나 아니면 두 가지 경우가 다 해당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이니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면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구원을 찾아 예수님을 찾아 절박하게 뽕나무에 매달려있던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삭개오. 얼른 내려오시오. 오늘은 내가 당신 집에 묵어야겠습니다.”
여기서 쓰인 묵다의 그리스어 μένω (menō) 라는 말은 성경에 수차례 나오는 말입니다. abide라는 뜻이지요. 머무르다, 깃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잠시 머문다기보다는 영원히 함께 한다라는 뜻으로 쓰인 동사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며 한 말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한 1:32-34)에서 성령이 내려서 머문다 할 때 그 머문다는 뜻입니다.

느닷없는 예수님의 말씀에 삭개오는 허둥지둥 나무에서 미끄러져 내려옵니다. “아무렴요, 이리로 오십시오. 제가 오늘 예수님을 모시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아마 하늘을 나는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여리고를 여러 차례 드나들며 키가 작은 세리장의 이름을 기억해두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를 부르십니다. 여리고에서 구원 받을 자가 삭개오 하나만 있었겠습니까마는, 이 순간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이런 광경을 접한 주변의 반응은 어땠겠습니까? 황당했겠지요. 예수님과 삭개오가 들리게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다니”라고 웅성거렸습니다. 여기서 묵다는 καταλύω (kataluō)입니다. 이것은 하루 저녁 머문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임하러 오셨는데, 사람들은 부잣집에 하루 머물고 가시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니 이런 말들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 저 예수라는 분은 저 더러운 인간이랑 같이 밥을 먹겠다는 건가? 삭개오가 이 동네에 하고 다닌 꼴을 보라고. 아니 가난한 자를 위한다는 사람이 돈 많고 더러운 저런 인간이랑 식사를 한다고? 저 사람 예수가 맞긴 한거야?” 의심의 눈초리로 사람들은 삭개오와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대문 앞에서 벌어지는 이 소란에 삭개오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겠지요. ‘아, 내가 이 동네 사람들에게 딱 이런 존재였던가?’ 화려한 식탁도 집안을 휘두른 비단도 삭개오의 마음을 다독여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동네 부자이자 세리장한테 “죄인” 소리를 면전에서 할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항상 가난한 자의 편에 서셨던 예수님이 옆에 계시니 울분이 터져나와 한 말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전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겠지만, 직접 그 말을 듣는 삭개오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을 뿐,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얼굴이 벌게진 삭개오가 한 마디 하고 나섭니다. “그만 좀 하시고, 내 말을 들어봐요.” 삭개오가 문 앞에 서더니 동네 사람들이 다 듣게 큰 소리를 쳤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등쳐먹은 일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다 내놓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지요? 평생 악착같이 욕먹어가면서 번 돈을 다 쏟아놓겠다고 삭개오가 말을 해버립니다.

그 때까지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던 예수님께서 일어서셔서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삭개오는 재산을 절반 내놓은 탓에 구원을 받았을까요? 뽕나무에 올라간 정성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께 밥을 대접했던 탓이었을까요? 삭개오는 무엇을 잘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을까요?

재산을 내놓는 삭개오와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 귀에 익지 않으신가요? 목동이신 예수님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시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내신 순간입니다.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지나치셔서 회개하는 죄인을 찾으시고는 기쁨의 복음을 주시는 순간입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죄인인 양은 자신의 재산을 버리는 것으로 마음을 보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순간, 그 기쁨의 순간. 자랑하고자 모신 집 앞에 선 군중들의 모욕. 그 외면하고 싶은 순간. 이 모순의 교차점. 부자이면서도 동네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해야 했던 그 모순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삭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공명합니다.

낯간지러운 짓이지만 인용 하나 하겠습니다. 오그라드실까 죄송합니다.
시인 김춘수는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삭개오는 예수님께로 와서 꽃이 되었습니다.
그 꽃을 보고 예수님은 몹시 기뻐하십니다. 그 꽃이 이쁘다고 또 한 번 불러주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라고 꽃의 향기를 즐기십니다.
구원이 임한 것은 삭개오의 집뿐만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죄인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구원의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삭개오가 재산을 내놓아서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삭개오가 길 잃은 한 마리 어린 양이었고, 구하면 기쁨이 배가 되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구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 집에 머물겠다. 내가 너희 집에 깃들겠다”라고 하신 순간부터 이미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의 은총을 퍼부어 주고 계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삭개오가 응답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은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인생의 방향을 몰라 정처없이 해메이던 때 하나님은 저희 담임목사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궁금해서 담장너머로 깨근발을 짚던 수줍은 저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담장 너머로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깨근발을 짚었을 뿐인데, 전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담장을 넘어 새로운 세상에 도착해서 여러분들께 기쁨의 복음을 전하려고 딴에는 애 쓰고 있습니다.
그저 담장에 다소곳이 손을 올리고 담장 너머 하나님의 왕국을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삭개오처럼 그저 먼발치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뵈어야겠다는 소박한 희망에 뽕나무 가지를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또 구원을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여러분은 무엇을 쥐시겠습니까? 세리장 삭개오처럼 주판을 손에 쥐고 눈앞의 행복과 재물을 위해 사시겠습니까?
삭개오는 죄인이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세리는 국가공무원에 준하는 신분이었고, 나라의 세금을 걷는 것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고, 수입이 높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회에서 저런 조건에 다 부합하면서 욕을 먹는 직업을 알지 못합니다. 합법적으로 돈을 벌었고, 돈이 많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 했습니다.
그런 삭개오를 보면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가게를 하면서 노동법을 준수하는 선에 종업원들을 닥달해서 돈을 벌던 저는 범법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법에 맞는 일이었나를 되물어봅니다. 삭개오처럼 손에 주판알을 튕기며 이웃을 내몸과 같이 생각하지 않았던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그것이 주판알을 손에 튕기며 준법을 외치는 제 인생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은 무엇을 쥐시겠습니까? 주판알 대신 죄인 삭개오처럼 뽕나무 가지를 붙들고 그 분을 보기만 해도 좋겠다고 매달려보시겠습니까?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매달려 있는 성도 여러분의 간절한 눈빛으로도 족합니다. 큰 결심이나 대단한 각오나 커다란 희생이 있어야 우리에게 구원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그런 아름다운 사랑과 희생은 담장을 넘어 선 이후의 일입니다. 삭개오의 선언이 예수님이 머무시겠다는 선언의 이후였던 것처럼, 우리는 그저 뽕나무 가지를 붙들고 예수님을 그리워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뽕나무가지입니까? 주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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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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