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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Archives: 자유게시판(공개) (page 4)

비구승

잿빛 승복속에 같힌채 출구를 잊은 육체 속 춤추는 핏물.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는 도, 도라는 물건, 보일듯 잡힐듯 하지만 그때마다 빈 손이다.
웬 윤회는 그리 빠른지 30이 되니 급하고 허무하다.
깨치기만 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더니, 천재들의 이야기인가. 범부는 시간만 보낸다.
일회밖에 배당되지 않은 청춘을 적막한 산속에서 장사 지내고 있다. 중얼거리는 언어마다 죽은 언어다. 그 뜻을 알리가 없다.
선승들이 그때 그때 허접한 마음을 뱉어내서 생긴 죽은 언어, 사어들, 계면적어 터뜨린 공허의 언어 모듬 접시다.
아! 너무나 허무하다. 생피처럼 뚝뚝 떨어지던 그 허무의 언어, 그 절망의 언어들이 배암처럼 내 몸둥이를 휘감고 있구나.
출구를 못 찾고 펄떡이는 피의 고뇌를 누가 알리오. 새벽마다 힘차게 발기하는 성기와도 같은 젊은 비구승의 번뇌를 누가 알리오.
석가라는 종교의 천재가 꿈꾸던 부처의 나라, 불국토. 모든 번뇌와 고토잉 끊어진 경지,
불교 최고의 이상사회가 불국토였지만 위대한 자의 마지막 망상은 아니었을가? 비구승은 가부좌를 풀고 하산한다.
동네 거지들 모아 발이라도 씻어 줄가 보다. 고독의 사어들이여, 안녕.…

예수 붓다 모두 진보

(채희탁)

예수가 세상을 거닐 때는 여자가 사람축에 들지 못했다.
깨끗하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으며 그래서 사람 축에 들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는 깨끗하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는 사람과 어울렸다.
창녀가 돌팔매에 죽게 되었을 때
그녀를 구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고
그래서 예수는 진보다.
시공을 훌쩍 뛰어 넘어
21세기 오늘의 한국, 예수는 무엇이라 할꼬?
여자는 직관에 의한 판단이 정확하고 남자보다 빠르다
남자는 직관에 이한 사태 판단은 느리나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판단에는 강하다
이제는 너희 둘의 공동 책임이다.
서로 도와주고 보완해야 한다.
잘못되면 이제는 아무도 너희를 도와주지 못한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부처는 해탈에 들기 전에
여자에 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여자냐 남자냐가 아닌 인간 일반에 대하여 설법했다고 생각된다.
세상사에 직접 관여 하는 것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 같다.
나를 따라서 해탈하도록 설법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해탈의 설법이 무슨의미였겠는가?
더럽고 죄많은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설법을 펼쳤다고 생각되는데
이게 그의 중생 구제의 핵심정신이다.
그도 예수와 같이 진보였다. …

소크라테스의 꿈

(문영조 장로의 기고문입니다)

저승이 있는 것 같은데 손에 안 잡혀. 국가나 사회가 돌아가는 과정을 길게 관찰하면 결국 초월적인 힘이 관좌를 하는 것 같단 말이야. “이데아”라는 말을 만들어 놓고 진리의 최고봉이라고 떠들어 봤지. 내가 만들고 내가 소리치면 선전해 보았지만, 그리고 어느정도 다수의 제자들의 동의도 얻었지만 나 자신은 허무하더라고. 저 세상이 있다는 말도 못하겠고 또 없다고도 못하겠고 그래서 저승의 그림자 정도의 가상의 이상향을 그려 본 것이지. 그래서 “이데아”가 과연 정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느냐 아니냐를 고민하고 있지. 결국 신은 보이지 않고 신은 꼭 필요하고 그러나 신은 있음직 하면서 그 그림자만 희미하게 비쳐주고 있거든. 미치겠어.

제자들아, 그러니 어찌할꼬?
방법은 하나. 몸 건강 유지하고 밥벌이를 하며 열심히 생계를 유지하게. 그러나 철학을 통한 진리의 길에서 이탈하면 안되네. 만약 빗나갈 경우 자네의 인생자체가 무가치의 늪에 빠지고 말게 되네. 젊은 시절에 특히 기초 철학을 잊지 말게. 그러다 늙어지면 취미를 가지고 소일거리를 찾는 거야. 즐겁게 인생을 마무리 지워야지. 카드놀이, 낙시, 정원 가꾸기 또 그림그리기 등. 그러나 잊지 말게. 즐기면서도 반 이상의 시간을 인문과 철학에 집중 투자하여 참 인간이 되어야 하네. 그래야 그대의 고독한 인생이 “이데아” 건너편 언덕에 있을지도 모르는 저승에 갈 수가 있지., 그렇게 해서 보상을 받아야지.
나, 소크라테스는 확신하네. 진리 속에 살고 진리를 붙잡고 늘어지다 죽으면 그 보상이 있을 거 라고. 진리가 아무 소용없이 안개나 뜬 구름처럼 없을 무로 살아진다고 생각되면 내가 뭐 잘 낫다고 겁없이 이 독주를 마시고 편안히 죽을 수 있겠나. 안 그래?
현 실권자 아니토스가 자기 실패를 숨기려 하고 있어. 스파르타와 싸우다가 패전하고는 그 희생양을 찾고 잇다가 나를 발견한 거지. 나는 그의 더러운 손에 죽기 싫어 내 손으로 직접 나를 없애기로 했지. 나는 죽었고 아니토스는 살았지. 그러나 나는 반대로 생각해. 나는 살고 그가 죽은거야. 이게 철학이지.…

평화의 교회는

(채희탁 교우의 기고입니다)

전쟁의 한 복판에 평화는 꽃으로 피어 난다.
전쟁터에는 의와 악이 공존한다.
평화는 의와 악의 싸움터에서 자란다.
평화의 교회는 참으로 힘든 싸움의 한 복판에 있다.
평화의 교회는 외롭다.
평화의 교회는 외로움을 딛고 그 외로움을 운명처럼 받아 들인다.
정치가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보수는 악이고 진보는 선이다.
문화가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겹칠 수 있다.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는 상황에서는 그 구분이 모호할 때가 있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옳은 해답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다.
변화를 동반해서 되풀이 된다.
그 변화는 진보적 발걸음으로 이어져 왔다.
그래서 역사적 발전이라고 하였고 왕권정치- 귀족정치- 시민 정치의 발자취를 보여 왔다.
평화의 교회는 선의 방향으로 역사가 발전할 것을 굳게 믿고 있다. 어떤 힘센 자가 무엇이라 해도… …

사드 배치와 한국의 현실 그리고 문제점

(채희탁 교우의 기고입니다)

한국에 미리 설치된 사드는 몇 개나 될까? 그 수도 불확실하다. 그 숫자는 대통령도 모르고 있다.
사드는 미국의 무기 체계다. 그런데 한국의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그 도입 및 설치 상황을 모르고 있다. 군부의 보고 받지 못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전시 작전권은 미국이 쥐고 있고 한국은 미국의 작전에 복속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대통령도 그 배치 관련사항을 모르고 있다면 이는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나라인가를 외치던 때가 생각난다. 미국에 다녀 온 한민구 전 국방장관의 기자회견 내용도 어처구니 없다.
미국이 우리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고 있으며 어쩌니 저쩌니 하는데 요지는 미국이 한국의 방위를 위한 조치로 그리고 극동 및 동남아시아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목구멍에 무언가 걸려 있는 것 같다. 걸린 것이 너무 커 뱉을 수도 없고 넘어가지도 않는다. 많이 아프다.

어느 동창 선배의 말이 기억난다. 언제나 정의와 자유를 앒세워서 항상 불의와 속박하는 것이 그들의 과거고 현재인데 미래에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미국의 힘은 막강하다. 사드 배치는 한국의 법에 따라 설치 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 한국민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도덕경 21장

도덕경 21장 (채희탁)

반듯해도 남을 해치지 않고
청렴하되 남에게 상처입히지 않으며
곧아도 교만치 아니하고
빛나도 번쩍거리지 않는다
荀子(순자) 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너그럽되 느슨하지 않고
청렴하되 상처주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화합하되 한 통속이 되지 않았고
부드러우나 물러 터지지도 않았다.
겸손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 (남구만 1629-1711 이 병조판서 총처량의 신도비명에 그의 인품을 표현한 글)
본관은 무슨 말을 할꼬
시기하는 마음이 들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꾸고
나를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이해하고 나를 곧게 세워 진리의 길로 나아간다.
항상 잔잔한 호수와 같이 평정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이슬 한 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휘청이며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다.
앞이 보인다. 내가 보인다.
교만해 지면 자연에 순응한다.…

누가 우리의 주적인가

누가 주적인가?

채희탁 교우

1945년 남과북이 삼팔선으로 분단된 이래 72년의 세월이 흘렀다.20대 후반에 독일을 비롯한 구라파 지역을 여행한적이 있다. 49년 전이었습니다. 독일사업체와 거래가 있어서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업체의 사장을 나이로 보면 저의 아버지 연배였으며 한국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분의 얘기를 듣는 나도 참으로 참담한 기분이였다. 솔직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원래 하나의 나라로 같은 말, 한글을 쓰고,같은 언어로 서로 이야기 했는데 우리 세종대왕을 기리면서…….. 70년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여전히 남과 북이 서로를 주적이라고 열을 내고 있다. 주적은 우리 한 사람 생각과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오랜 세월과 더불어 쌓이면서 굳어진 무의식의 세월의 표상이라 할까. 남북접촉을 통해서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이를 기회로 하나가 되는 통일의 미래를 열어가는 어쩌구.문제의 빨갱이 대통령이 씨부렁거렸네요….그래도 다행스럽게도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 아니네요. 지금도 북한을 주적이라고 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귄익과 관계기득권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쓸것이다. 북한에서도 사정은 대동소이할 것이다.

미국은 어떠한가? 남한을 강력지원하여 변함없는 우방이라고 떠든다. 왜 지지하는가? 한국을 위해서라고? 극동지역의 정치, 경제,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데. 일본을 포함한 극동 아시아 지역의 방어가 극동 아세아가 중국의 관할지역으로 넘어가면 일본을 꼬봉으로 둔 미국의 대아세아 정책의 거의 치명타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드배치를 그렇게도 서두르고 이를 기정화하는 속내를 알 수 있다. 추가 배치도 우려된다. 러시아는 어떠한가? 러시아는 한국이 많이 필요한 입장이다. 한국은 극동지역 또 태평양으로 발전할 수 있는 최상의 통로이며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한국과의 협조는 러시아 당국에 이익이다. 광대한 시베리아 개발에 한국이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주적이 더 명확해 진다. 미국, 일본, 중국이 우리의 주적이 된다. 여기서 중국은 외교의 상대로 서로 협력할 여지가 충분하다. 일본은 항시 강자에게 꼬리를 흔드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니 미국의 최대 협력국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이 커지는 것을 꺼려 왔다.

그러면 우리의 장단기 주적이 분명해 진다. 미국, 일본이 우리의 주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국, 일본과 각기 외교의 역량을 발휘하여 극동지역의 안정과 평화의 지레대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북한과 남한이 서로 주적이라고 야단스럽게 떠들석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주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국과 일본도 우리의 성숙된 외교로 우리의 국익에 부합되는 협의가 가능할 것이다. 다수국민의 지지를 받는 문재인 정부는 그 지지를 등에 업고 틀림없이 우리의 희망을 열어 갈 것이다. 어렵겠지만 몹시……

부활 – 치욕의 박근혜, 부활의 노무현

부활 2017
문영조

5월 23일 치욕의 박근혜

산 사람 죽고 죽은 사람 다시 산 날
수갑차고 대강 올림머리에 민 낯
18가지 죄목에 “아니오, 속았어요, 몰랐어요”
마지막 용서 받을 카드도 던지는 503호
꿈속에서 아버지 품에 안기며 “다 배반자들이어요”
그렇게 좋다던 유신 따라하며 우아게 미소까지 뿌렸는데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대는 무리들
도둑과 아첨의 숲에 묻혀 산 인생
그대의 길은 이미 정해졌다
생과 사 어디서나 버려진 땅에 핀 야생화
거친 바람에 꽃잎이 메마른다

5월 23일 부활의 노무현

산 사람 죽고 죽은 사람 다시 산 날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냐 운명이다”
고향 길 옆 낮은 언덕 삐죽 나온 비석
5만의 발길 봉화의 함성
“아 ~ 기분 좋다”
다 내려놓고 밀짚모자 눌러 쓰고
자전거 타고 담배 한대 꼬나 물고
“사람 사는 세상”을 하얀 연기속에 새기던 그대
깨끗한 영혼은 삶과 죽음을 자유롭게 거닌다
마른 땅에 솟아 난 생명나무
피 뿌린 뿌엉이 언덕에서
몰아치는 공기의 바람소리
살아 숨쉬는 영혼의 소리…

프리모 레비의 자살

채희탁 교우

사람은 왜 자살을 하는가? 지구상의 어느 생물도 자살하지 않는다. 다윈의 진화론에도 어긋나는 행위이다. 자연질서에 반(反)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자살을 인간의 철학적 행위로 설명한다.
한국은 OECD 20개국 중 자살율 1위이다 그것도 여러해연속해서… 보고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자살한 예가 없었다. 그 혹독하고 비 인간적인 상황에서 40년간 자살은 없었다. 그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이나 그 후 나온 뒤에는 있었다.
한국 젊은층의 실업률이 높다고 한다. 실업률과 자살률에 관련성이 있는가?
기독교에서 자살은 금기다. 기독교 신자가 많은 한국에서 왜 자살률이 높은가? 믿음이 굳건하지 못해서? 핑계를 여러 방면에서 찾다가 찾을수 없을 때 자살을 한다고 한다. 그런가?
공자, 맹자 유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자살을 어떻게 받아드릴 수 있을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자살할 수 있다. 앞으로 무엇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살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권력, 명예, 돈 인가? 아니면 무엇이 삶의 의미이며 목표인가?
자살은 아름다운 환상적인 매력일 수 있는가? 그래서 자살의 유혹에서 도망칠 수 없는가? 니체나 사르트르의 자살에 대한 생각은 긍적적이고 Positive한 입장을 취한다. 키에르케고로의 자살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이고 강하게 반박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살을 긍정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판적이다.
자살은 Home Sapience로 진화한 그 진화코스(Evolution course)에서 어긋난 길로 나가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암울한 현실 등으로 결혼을 하지 못하면서 한국인의 인구증가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몇 백년 이내에 한국 인구 Zero를 예상하기도 한다. 공동체로서의 한국이라는 국가는 Virtual 실체로서 살아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174517”프리모레비 묘비에 세겨진 수인번호. 아우슈비츠에서의 내 경험은 내가 받았던 종교 교육중 그나마 남아있었던 것을 일소해 버리는 것과 같았다………. 아우슈비츠가 있다. 그런데 신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이런 딜레머의 해결점은 아직 찾지 못했다. 찾고 있지만 찾지 못했다.
프리모레비는 총 14권의 소설, 시집, 평론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음의 다섯권이다.
-이것이 인간인가(1947~1958)
-휴전(1963)
-주기율표(1975)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이 다섯권을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까지를 읽어보면 방대한 하나의 작품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것은 세계전쟁과 대학살이라는 경험을 “인간”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받아들인 인물의대략 40년간에 걸친 사상적인 격투를 그린 이야기 이기도하다
첫 작품인 이 책의 서문에 프리모레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물자부족, 노역, 허기, 추위, 갈증등은 우리의 몸을 괴롭혔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정신의 커다란 불행으로부터 신경을 돌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는 완벽하게 불행할 수 없었다. 수용소에서 자살이 없었다는게 이를 증명한다. 자살은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 일상의 절박함이 우리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 놓았다.
우리는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이나 그 후에는 자살할 생각에 가까이 간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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