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성장은 하고 있었지만 교민 교회 지형은 바뀌고 있었다. 1987년 대한민국에서 6월항쟁을 거치면서 대통령 직선제 즉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고, 1988올림픽이 연이어 열리면서 역사와 정의에 대한 시민의식은 많이 축소되었다. 더 이상 심각해 질 필요가 없었다고 예단해 버린 것이다. 교계도 마찬가지여서 독재정권과의 투쟁이 의미없어진 상황에서 일부 교회들은 대형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진보적 성향의 교계들은 새로운 의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진보 명망가 일부는 정계로 방향을 틀면서 한국 교회는 복음주의라고 하는 탈 사회 , 탈 역사적 풍조가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김기대 목사의 글을 보자.

한국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4년 이후 체제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1974년 여의도에서는 엑스폴로 74대회라는 큰 전도행사가 열렸다. 당시까지 기독교 교회 협의회(NCCK)를 중심으로 권력과 어느 정도 긴장관계를 유지하던 주류 교단들은 이 행사에 큰 위기감을 느낀다. 비주류 교단에 의해 치러진 교회 연합행사에서 주류 교단이 그동안 해내지 못했던 거대한 에너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난 뒤 한국 교회는 1984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대회를 열면서 또 한 번 세를 과시한다. 74년 대회와의 차이점은 주류 교단이 참여하면서 비주류 교단의 조용기 등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74년 대회에서 위기감을 경험한 주류 교단은 이 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한경직•강신명•강원용 등이 주제 강사로 나서고 빌리 그래이엄이 주강사로 다시 초대 되었다. 민족통일과 평화, 교회 개혁 등 사회적 이슈도 주제로 채택되었다.

74년 이후 새로운 교회 문화 앞에서 머뭇하던 기존의 대형교회들도 이 대회 이후 경쟁시장에 뛰어든다. 민족 통일, 평화, 교회 개혁 얼마나 멋진 주제들인가? 대형 경쟁에 뛰어든 교회에게 면죄부를 주기에 말이다. 동네 구멍가게를 다 망하게 해놓고 이웃돕기 특별 이벤트를 벌이는 대형마켓이 겹쳐지지 않는가? 당시 가장 시급한 주제는 독재 타도였지만 이 대회에서 누구도(강원용조차도) 그것을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대형화를 향한 무한 경쟁이 몇몇 윤리적인 이슈들로 희석되면서 교회는 윤리와 성장이라는 두 날개 위에 비상하게 된다.

지금 한국 교회가 정상이라고 분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른바 진보적인 신학계에서 이루어지는 분석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들의 분석 프레임이 대부분 84년 이전에 매여 있다. 진보 보수의 프레임이나 반공주의, 서구신학의 영향을 받은 연구실 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교회 안에 머물지 않아 살아있는 현장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적어도 현대 한국 기독교의 문제에 대한 분석은 1984년 이후 체제를 모르고는 설명될 수 없다.

한국 교회의 천박한 극우 거리집회는 우리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지만 84년 이후 체제에서 성장한 교회들은 이러한 행사를 외면하거나 적극 참여하지 않는다. 김동호•(고)하용조•이재철•(고)옥한흠 목사 등은 요즘 하는 말로 이들과 ‘컨셉’이 다르다. 김동호는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한 김홍도를 향해 그렇게 김일성을 욕하면서 당신도 똑같지 않느냐며 대놓고 묻는다. 이처럼 84년 이후에 성장한 고학력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는 한마디로 세련되었다. 84년 이후 교회들은 성공이라는 세련된 주제에 집중한다. 어느 화려한 극장 못지않은 교회 시설에 익숙해져 있는 교인들을 시청 앞 차가운 아스팔트로 내몰지 않는다. 그 교회 교인들은 선교 봉사 나눔 등에서도 모범을 보인다. 그들의 숨겨진 욕망을 감추려는 듯 기도에 열심이다.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치열한 현장에서 대학을 다닌 세대들 중 대부분은 그때 투신하지 못하고 졸업과 취업의 길을 순탄하게 걸어온 것에 대한 죄책감들이 있다. 그 죄책감은 사회 정의와 개인의 성찰을 위해 필요한 죄책감이다.

그런데 84년 이후 성장한 교회들은 이런 죄책감을 영적 죄책감으로 대체시킨 후에 그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해주면서 허전함을 선교나 봉사와 같은 것들로 채워 준다. 그 프레임 속에서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별 고민 없이 무한 경쟁에 뛰어 든다. 그리고 자신들이 고학력으로 누렸던 그 성과물들을 자녀들에게 세습시키기 위해 사교육 시장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며 교회는 이들의 고득점을 위해 입시 기도회를 여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84년 이후 체제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이처럼 좋은 교회와 나쁜 교회가 확연히 구분된다. 반공의 첨병인 교회들은 나쁜 교회이며 세련으로 무장된 교회들은 좋은 교회가 된다. 그런데 과연 남북분단 이후 월남자들이 주축이 된 반공적인 영락교회가 자본주의로 무장된 84년 이후 교회들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 목회자들이 즐겨 쓰는 예화에는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담그면 금방 튀어 나오지만 천천히 데우면 거기서 익혀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산층 이상의 세련된 기독교인들은 시청 앞에서 보수 기독교인들이 치르는 그 촌스러운 행사를 보고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 뜨거운 물에서 튀어나온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첨병이면서 적당한 선행을 하는 교회 구조 속에서 천천히 익어가는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84년 이후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우리는 ‘좋은 교회’ 안에서 천천히 익어가게 된다.

고학력 중산층 기독교인들이 성공주의와 편의주의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 한국 교회 위기의 근본이다. 적당한 선행에 성공을 향한 그들의 욕망은 감추어진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기득권을 계승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신앙 교육 환경도 최상의 조건으로 만들어 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신심이 초월적 영성인 것처럼 착각한다. 이들이야말로 나라가 좌파천국이 될까 걱정하는 반공주의 기독교인들은 그나마 자기들의 신념을 위해 거리에라도 나서지만 이들은 세련 뒤에 숨어 이쪽 저쪽 어느 쪽에도 헌신하지 않는다. <뉴스 M>

교회는 이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해람 장로교회는 외견상으로는 90년대 초반까지 큰 지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당시 진보교회의 상징이었던 선한사마리아 교회의 홍동근 목사가 남북 화해 운동에 전념하면서 그 교회의 교세 규모가 조금씩 축소되기 시작한 것도 해람 장로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일부 교인들이 선한 사마리아 교회로부터 옮겨 왔기 때문이다.

해람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인 교회의 지형이 이처럼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1990년대 –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정점에서

1990년대가 밝았다. 교회는 꾸준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덕유 정경학 조성철씨가 장로로 임직되었으며 구우찬 김원철 김인철 김지섭 오성희 유성일 이경원 이선이 전도상 정초옥씨가 새롭게 집사로 임직되었다. 첫주일 주일 참석 예배는 14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일학교 65명)

김승남 전도사(현재 PCUSA 소속 목사) 가 주일학교를 맡아 부임했다. 남선교회는 정암섭 집사가 회장을 맡았고 여전도회는 박선영집사가 회장을 맡았다.

구역예배가 각구역별로 활성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3월 25일 주보에 따르면 김세진 씨가 “지난 4개월 동안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신앙 모범가정으로 표창받았다고 되어 있다. 모두가 어려움과 기쁨 속에서 교회를 위해 헌신해 갔다.

그해 부활절 특별헌금은 본당 구입 금액 중 미상환 잔고를 환불하는 목적으로 드렸는데 모두 $22.050가 헌금되었다. 176명의 교인들로서는 최선을 다한 금액이었다. 이 일로 본당(지금의 친교실 건물 제외) 건물에 대한 빚이 모두 청산되었다. 당시 교인들이 얼마나 교회를 사랑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5월 18일부터 20일까지는 최창욱 목사(당시 미국장로교 한인 목회부 총무) 를 강사로 특별 사경회를 열었다. (주제: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또한 성경암송 대회 친선 낚시 대회 등 신앙적인 부분과 친교적인 부분 모두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해 7월 8일에는 교인들의 글모음집인 카이로스 1호가 발행되었다. 카이로스는 두 달 간격으로 발행되다가 1992년 27호까지 발행 된 후 중단되었다.

9월에는 수재를 당한 고국의 이재민들을 위해 헌금을 드리는 등 꾸준한 구호활동도 지속되었다. 1991년에는 창립 16주년 예배를 드리고 백학구 장로에게 공로상을 시상했다. 백장로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기도한 것으로 교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 해들어 교인수는 150명 대(주일학교는 50명대)로 줄어들었다.

1991년 2월에 김승남 전도사가 사임했고 심상권 목사가 중고등부를 잠시 맡았다. 남선교회장은 김인성 집사가 여전도회장 신은옥 집사가 맡았다. 3월에는 김영경 목사(하워드 김, 현재 사우스베이 장로교회 담임)가 교육부 목사로 부임했다. 4월에는 백정희 씨가 지휘자로 부임하는데 백정희씨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지휘자로 성실하게 책임을 다했다.

1991년 5월 19일 주보를 보면 이창식 목사가 선한 사마리아 교회 김상의 목사 취임식에 참여한다. 홍동근 목사 후임 (2001년 11월 뇌출혈로 북한에서 별세)으로 김상의 목사가 부임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도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8월 4일에는 교회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교회 명칭변경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해람이라는 말이 창립목사의 호에서 따왔다는 점에서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미 해람 장로교회가 교민 사회에서 특색있는 교회로 알려졌는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반대의견도 많았다. 이덕유 문영조 이진수 조성철 장로와 권사회장 남선교회장 여전도회장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이 위원회 구성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실제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99년이었으니 이름 하나 바꾸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교회는 조금씩 갈등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8월부터 김영경 목사가 풀타임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주보에서는 현재 오페라 가수로 한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원정씨의 이름도 자주 등장한다. 김원정씨는 지금은 세상을 뜬 이모 집사의 며느리였었다.

교회 창립 17주년이 되는 1992년에는 강희창 장로가 장로로 임직되었고 강진석 구용숙 김경희 김성숙 김승은 김정자 노신경 백정희 신영경 안혜옥 오명원 유경숙 유기환 이명자 허승룡이 새로이 집사로 선출되었다.

이민 생활이 안정되어 가면서 집을 마련한 젊은 가정을 중심으로 자녀들이 한 데 모여 친교를 나누는 Youth Night나 Ski Camp도 여러번 열렸다. 새로운 신자의 등록도 지속되었지만 이민이 주춤해지면서 그 수는 확연하게 줄게 된다.

남선교회장은 신영식집사가 여전도회장은 김정화집사가 맡았다. 교육관 (현재 교회 서쪽 끝 임대용 건물) 보수 공사를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3월 25일에는 김진홍 목사 여전도회 특강을 위해 교회를 방문했다.

1990년대 – 리더십 교체

1992년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시민 소요 사태가 발생한다. 흑인 경찰에게 폭행당한 로드니 킹 사건이 촉발한 흑인 소요의 피해는 애꿎게 한인 사회가 떠 맡게 되었다. 그 동안 이민자로서 열심히 삶의 터전을 일궈온 한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일부에서는 총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조직되었다.

교회에서는 김이철 집사가 5월 4일 강도의 총을 맞고 별세했다. 4·29 사태의 와중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으나 그 여파로 인한 강도 행각에 의해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그밖에 이은식 김예성 김윤철 이선이 이운선씨등이 피해를 입어서 교회에서 위로금을 전달했다. 또한 $4,441을 한국일보사에 전달했고 미국장로교 태평양 노회와 KPC(미국장로교 남가주 지역 한인교회 협의회) 에서도 구호금이 전달되었다.

이창식 목사는 선한 사마리아인 교회 임시 당회장을 맡았다. 김상의 목사는 1년여만에 선한 사마리아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진보적인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1993년에는 이덕유 정경학 조성철이 장로로 취임하였고 구난주 구우덕 구우인 김영희 김인성 김인숙 문경덕 신정득 신호건 양경옥 양만국 유한종 이수옥 정암섭 조영훈이 집사로 임직되었다.

교회 조직이 예배부, 기획부, 전도부, 교육부, 친교부, 음악부, 재정부, 관리부로 재편되었다. 1월 31일에는 이창식 목사 은퇴예배를 드렸다. 이후 담임목사가 공석이 된 상태에서 박창환 김하태 목사 등이 주일 설교를 전했다. 이 해 남선교회장은 송상하 집사가 여전도회장은 이정성집사가 맡았다.

3월 14일에 열린 공동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청빙위원을 선출했다.

위원장: 김종근 서기: 조희영 위원: 문영조 백형설 김인숙

또한 장로교 법에 따른 청빙절차를 노회 목사인사위원회에서는 Ms. Kathryn Odle을 대표로 파송한다. 미국장로교에 가입한 후 첫 담임목사 청빙이라는 점에서 교인들은 미국장로교 법을 준수하는 데 최선을 기울여서 청빙과정에서 발생할 잡음 요인을 제거해 나가는 성숙함을 보였다.

4월 30일에는 태평양노회와 한미노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기도예배가 ‘화해와 용서’ ‘평화와 단합’ 이라는 기도제목으로 월셔한인장로교회에서 모였다.

5월 2일 담임목사님을 청빙하는 동안 임시목사님으로 이용철목사가 부임했다. 미국 장로교 법에 따라 이용철 목사는 인터림목사로 부임한 것이다. 이해부터 YOUTH GROUP에서는 9월 26일 90명분의 샌드위치를 만들어 엘 에이 다운타운 노숙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목사 공석기에 교회는 열심히 변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1994년 1월 2일에는 교회 창립 19주년 예배를 드리면서 임직자 안수식을 가졌다.

장로 : 김 인 숙

1월 8일에는 청빙위원회에서 공천하고 공동의회를 통과한 조수경 목사의 노회이명 청원이 태평양 노회에서 허락되었다. 3월 27일 주일부터 해람교회에서 시무를 시작한 조수경 목사의 위임예배는 5월 15일 태평양 노회 목사 위임 전권위원회 주관으로 열렸다.

8월에는 미국 내 수해지역과 아프리카 르완다의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구제를 위한 특별헌금을 드렸고 11월 마지막 주일부터 당회는 세대간 간격의 해소와 교회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의 표명한다는 차원에서 12월말까지 어린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1995년도 1월 15일 교회창립 20주년 기념예배에서는 이창식 목사를 명예목사로 추대했다. 그리고 백학구 이대수 정용진 장로 공영은 집사 등에게 공로상을 시상했다. 이 해 임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장로: 신영식 집사 : 김주영 신경덕 이용숙 정인미 이남준 이정수

이해부터 여전도회와 남선교회를 각각 여신도회와 남신도회로 바꾸기로 하고 여신도회장은 안상미 집사가 남신도 회장은 윤응진집사가 맡았다.

5월 14일 주일에는 16년 1개월을 봉사한 박명필 명예 전도사의 은퇴예배가 있었다. 18일에는 권사회와 여신도회를 통합하고 7월부터 조수경 목사의 부인인 박계자 목사를 교육 목사로 임명한다.

1996년 1월 7일 교회 창립 21주년 기념예배 및 장로, 집사 안수와 취임식을 열고 다음과 같은 임직자를 인수했다.

장로: 김성희 송상하 정암섭 집사: 강예원 정대희 곽동엽 이효금

그리고 두 달 간격으로 발행해 오다 27호로 끝났던 카이로스를 20주년 기념 회지로 확대 발행한다.

1996년 남신도회장은 윤응진 집사가 맡았고 여신도회장은 조희영 집사가 맡았다.

교회에서는 Church Mission Study(교회 사명 연구)를 위한 설문지 배포했다. 설문의 내용은 오늘의 세대에서 회중이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고 교회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설문지는 필요한 작업이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교회 여름 수양회가 8월 16일(금)부터 18일(일)까지 남가주 기독 수양관에서 ‘교회가 교회되게 하라’는 주제로 박종기 목사, 김승남목사가 강사로 참여한다. 80년대 교회를 방문하던 명망가의 세대가 저물고 있었다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1997년1월 5일에는 교회 창립 22주년 기념 에배를 드리면서 현인덕씨를 집사로 안수했다. 또한 박철원 집사(1982년 3월 – 1997년 3월까지 15년간 교회 버스를 운행), 구에스더 선생(교회학교 교사로 8년간 수고)에게 공로상을 시상했다.

1월 26일 예배 중에는 김갑숙 김옥희 박어연 신지근 유성일 유영순 이재희 정초옥 씨 등이 권사로 임직되었다.

박철원 집사가 남신도회장을 안해옥 집사가 여신도회장을 맡아 수고하게 된다. 남신도회는 교회 위기를 직감하고 자발적으로 토요 아침 기도회를 시작했다. 5월 13일(화)에는 임마누엘 장로교회와 공동으로 태평양 노회를 주관했고 7월 13일에는 교육관 별관 헌당예배를 드리게 된다.

1997년 교회 여름 수양회는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는 주제로 김영경목사(LA 가족상담소 간사)가 강사로 수고한다. 주제에 ‘하나’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은 이미 교회가 ‘하나’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집사회에서는 구제 사업으로 매월 셋째 주일에 LA 다운타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급식 봉사를 시작했다. 교회는 10얼 24일부터 한인들과 아시아인들로 구성된 2세 교회인 킹덤 장로 교회(피터 민 목사)와 교회 건물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당시 교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후에 킹덤교회에게 교회를 무상으로 사용하게 한 것은 1세 중심의 교회가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고 2세 중심으로 전환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피터 민 목사는 킹덤 교회를 개척해 한인 청년이 대다수인 회중 30여명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교회 창립 세대의 자녀들은 성장했지만 그들을 위해 2세 교회를 독립시켜 줄 여력이 없던 차에 킹덤교회는 좋은 파트너가 되었다. 그런데 3주차부터 예기치 않은 변수가 발생했다. 그해 11월 중 킹덤 교회와 연합 예배를 드리던 중 젊은이들이 드럼을 치고 전자악기를 연주하자 일부 교인들이 예배 중에 고성을 지르며 그들을 질타했다. 전통 예배에 익숙한 이들에게 젊은이들의 예배 형식은 맞지 않았던 것이다.

킹덤 교회는 김기대 목사 부임 후 1년 여를 더 평화의 교회에 머물다가 우리 교회를 떠나게 되고 현재 킹덤교회는 해산된 상태다.

11월 30일 조수경 목사는 4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임하게 된다. 조수경 목사의 사임은 여러 의미로 해석된다. 교인수가 1995년도부터 줄기는 했지만 담임목사의 책임만으로 교인들의 열성 부족으로만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 요인을 정리해 보면 다음의 몇가지로 볼 수 있다.

1. 이창식 목사 리더십의 공백이 컸다. 17년동안 교인들은 이창식 목사의 스타일에 익숙해 져 있었고 이창식 목사가 서울의 경동 교회 출신이었기에 경동으로 얽힌 인맥들도 있었다. 이창식 목사가 은퇴하자 이런 부분이 특히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은퇴 목사가 새로운 목사의 연착륙을 돕는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지만 이러한 관례는 미국장로교 법에도 어긋나고 이창식 목사도 후임 인선을 비롯해 어떤 과정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2. 이런 공백 상태에서 다양한 갈등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교회 이름 변경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갈등들이 이 시기에 더 증폭되었다.

3. 조수경 목사가 예배에 도입한 의례의 과도함에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례(ritual)는 장로교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한인들에게는 낯선 것이 많았고 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신흥 복음주의 교회들은 이른바 ‘말씀’, ‘제자훈련’, ‘내적 치유’ 이런 것들을 들고 나오면서 전통 예배는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었다.

4. 사모의 역할이다. 당시 교인들은 교회의 ‘수준’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목회자 아내가 공석인 상태도 감수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조수경 목사의 부인 박계자 목사 역시 전통적인 사모상보다는 결단력 있는 여성 지도자였다. 박목사는 한국 기독교 장로회 여선교회 연합회에서 일하고 있었고 잠시 우리 교회의 교육 목사를 맡았었지만 곧이어 헝가리 선교사로 나가기로 하자 교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사모’는 한국 교회에만 있는 독특한 직책으로 미국 교회 처럼 목회자의 아내가 다른 교회를 나가도 문제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한인교회에서 그러한 시도를 하기에는 2015년 지금도 요원해 보인다. 오히려 차기 목사 청빙에서 ‘사모’의 비중을 높게 봤다는 것이 김기대 목사 청빙 위원들의 은밀한 고백이다. 이 부분은 교회 핵심 그룹들이 한인 교회의 현실과 한계를 바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

5. 교회의 노령화다. 조수경 목사가 재임하던 당시 초기 교인들의 부모 세대가 연이어 세상을 떴다. 그러면서 초기 교인들이 교회의 최고 연장자 그룹으로 편입되면서 교회가 역동성을 잃게 되었다.

6. 교회의 지형 변화를 주목하지 못했다. 앞장의 김기대 목사 글에서도 나왔듯이 새로운 복음주의 교회들이 대형화를 시도하면서 세련된 프로그램으로 기존의 교회들을 위협했다. 그들은 전세대 복음주의자들처럼 ‘무식’하지 않았고 지식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지식인’교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우리 교회의 타격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전문직에 종사하던 교인들이 이 시기에 그러한 교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7. 2세들의 성장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 이민 초기 소수인종으로 겪었던 수모가 트라우마였던 1세들은 2세들이 ‘미국화’되기를 소망했다. 따라서 한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영어를 구사하는 2세 교역자들의 ‘몸값’은 높아서 채용이 불가능했고, 한국어만 구사하는 교역자들은 언어도 통하지 않았을뿐더러 뭔가 ‘부족한’ 자격 요건이라는 편견들이 있었기에 2세들은 교회를 떠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화학적인 결합은 생각하지 않고 ‘영어’와 ‘젊음’만으로 킹덤 교회를 불러 들였다가 실패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와 LA 흑인 소요 이후 한인 사회의 발전을 경험하면서 한국과 한국어는 기피 대상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 되었다. 김기대 목사는 ‘영어’와 ‘젊음’ 보다는 사회 의식과 신학을 젊은이들과의 소통 도구로 삼는 길을 택한다.

김기대 목사 부임하다

1998년이 밝았다. 이창식 목사가 임시로 교회를 맡고 조수경 목사는 2월 헝가리로 떠났다. 조성철 , 김인숙, 이진수 장로, 박철원, 장영순 집사가 담임목사 청빙위원으로 결정되었다. 교인들은 담임목사가 공석인 위기 상황에서 교회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4월 29일부터는 4복음서 성서쓰기를 시작하는데 그 해 10월에 마감했을 때 많은 교인들이 성심껏 성경을 써서 제출했다. 교회로서는 처음 시도해 보는 일이었다.

6월 중에는 교회의 수리와 교회의 체납된 건물비를 갚기 위한 헌금을 실시해 일부 비용을 모두 갚았고 8월에는 교회명칭변경위원회를 재구성한다.

9월 6일 주일에 김기대 목사가 3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김기대 목사는 연세대 신학과,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나왔고 서강대에서 불교로 석사를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종교학으로 박사를 취득한 뒤 부임 직전까지 토론토의 임마누엘 신학교의 방문교수로 연구하고 있었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동안에는 토론토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김기대 목사의 부임은 교회로서는 큰 모험이었다. 일단 전임 목사들이 평화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던 때에 비해 나이가 젊었으며 (부임 당시 40살) 교단적으로는 예수교 장로회(통합) 출신이었다. 미국장로교는 한국의 기독교 장로교와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과 상호 인정 관계를 맺고 있어서 4명의 목사는 모두 한국의 두 교단 출신이었다. 창립목사 백리언 목사는 통합 출신이었고 이창식 목사와 조수경 목사는 기장 출신이었다. 김목사 부임 당시 교인들도 대부분 기장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교회로서는 ‘진보’라는 기장적 색채를 버리고 ‘예장’으로 탈바꿈하겠다는 시도였던 셈이다. 눈에 띄게 줄어 버린 교세를 극복하기 위해 어려운 모험을 감행했다.

김기대 목사는 부임하자 마자 10월부터 매주 토요일 아침 기도회를 시작했다. 김목사 역시 교회의 탈바꿈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목요일 저녁 7시 집회도 시작했다. 11월부터는 경건교재 <말씀의 샘> 을 발행한다. <카이로스>나 <종>처럼 교인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제작되는 잡지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당시로는 두 잡지를 발간할 만큼의 여력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김목사의 부임으로 교회가 갑자기 성장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부임 당시 김목사의 나이보다 젊은 교인은 한 부부 뿐이었고 그들 역시 교회 등록한지 10년이 더 된 사람들이었다. 교회가 새 교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새 교인 일부는 과도기에 교회를 떠났고) 그에 따라 노령화되어 가고 있었다. 12월 유철균 집사 가정이 김기대 목사 부임 후 첫 교인으로 등록한다.

여러 가지 변화의 시도로 11월 22일 추수감사 주일에는 성경쓰기 시상 및 성악가 서미선, 조덕희씨가 출연하는 찬양제를 열었다.

목사를 청빙한 교인들의 의중과 목사의 의중은 일치했지만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하는지에 있어서는 불협화음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목사가 보기에 교인들은 과거의 기억 속에 매여 있는 듯했다. 사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과거라고 해도 기껏 7~8년 전 밖에 되지 않던 시기에 200여명에 이르던 교인이 60명대로 떨어졌으니 교인들의 조급함은 당연했다. 게다가 교회의 분열 때문에 교인이 줄어든 것도 아니니 조금만 하면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기대감들이 있었다.

하지만 차분하면서도 개혁적이고 복음적이면서도 사회 참여적인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은 바뀐 교회 지형을 감안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목사는 오히려 무너진 주일학교를 복원하는 일, 평화의 교회의 좋은 전통과 부족한 전통을 분리해내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김목사 부임 당시 주일학교는 10명 미만으로 줄어 있었고 주일학교라기 보다는 교육 전도사나 교사도 없이 어른들이 예배에 들어가면 자기들끼리 노는 수준이었다.

1999년부터 교회 이름이 ‘평화의 교회’로 변경된다. 교인들은 교회명칭과 관련된 갈등의 중심에 김목사를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이창식 목사로 하여금 공동의회를 진행하도록 했다. 그렇게 새로운 이름은 탄생했다. 새 이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 ‘태평양 연합 장로교회’가 유력했으나 부임 4개월이 안된 김목사는 이름이 너무 경직되어 있다며 한사코 반대했다. 새내기 목사의 고집에 일부 장로들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것 역시 다가올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1999년에 들어서면서 1월 24일에 김기대 목사 위임예배가 있었다. 그리고 31일 교회 명칭 변경이 노회에서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고난주간에는 전교인 철야 금식기도회를 열었다. 교회로서는 24년 만에 처음으로 해 본 시도였으나 교인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남선교회장은 박철원 집사가 여전도회장은 조희영 집사가 맡았다. 신도회의 명칭은 조수경 목사 부임 이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4월에는 정에스더 교육전도사가 부임했고 5월부터 교회학교 예배를 주일학교와 Youth Group으로 나눔으로써 주일학교가 조금씩 복원되기 시작했다. 6월에는 정에스더 전도사 주관으로 After School Program 인 ‘평화의 공부방’ 을 시작했다. 주중에 사용하지 않는 시설을 이용해서 지역사회에 봉사하자는 의도로 시작된 프로그램이었지만 그 또래 자녀가 없는 교인들의 협조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김기대 목사와 김현진 사모는 여러 학교에 흩어져 있는 아이들의 방과후 픽업과 간식을 해 대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교회 성장을 먼저 생각해야지 허튼 일을 한다는 볼멘 소리도 없지 않았다.

한국 신학잡지인 『기독교사상』 7월호에 김기대 목사의 ’발칸사태의 종교적 배경과 포용의 신학’ 이 수록되었고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 평화의 교회 선교방송을 8월 4일부터 시작해서 매주 목요일 새벽 1시 – 3시까지 진행 했다. 이것은 심야 방송 컨텐츠를 채우기 힘든 방송국측의 요청으로 시작된 것이어서 별도의 비용이 들지는 않았다.

김목사가 부임한지 1년이 되는 9월부터 예배용 성경을 <개역개정판>으로 교체했다. 이것 역시 김목사의 고집이었기에 갈등이 많았다. 이전까지는 공동번역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공동번역은 한국에서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김목사는 본래 공동번역과 번역 형태가 비슷한 새번역을 사용하기 원했으나 일부에서 그것은 아직 개정 중에 있다며 사용을 반대했다. 공동번역이라는 ‘세련된’ 성서본에서 개역 개정판으로 가는 일은 퇴보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새번역을 한사코 반대하는 일부 장로들 때문에 더 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김목사의 의중은 일단 교회의 특별한 색채를 버리자는 것이었다. 교인들은 일반적인 교회와는 ‘다른’ 교회를 원했지만 김목사 눈에는 ‘다름’을 강조하기에는 너무 가진 것이 없어 보였다.

청년층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9월 19일에는 청년선교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어린이들이 늘어나서 할로윈 데이를 대체한 Holy – Win Day 행사를 갖는 등 주일학교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해 공동의회에서는 오랫동안 교회에서 차량 봉사를 해 온 박철원 집사를 장로로 선출했다.

교민 교회 지형의 변화

Updated on 2015-09-08T23:28:44+00:00, by Yongho Kim 김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