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갈등들

2000년은 Y2K의 공포로 시작했지만 아무 일 없이 21세기는 시작되었다. 1월 16일 창립 25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25년 근속 교인들에게 공로패를 전달했다. 교회 역사 25년에 25년 공로패 를 받는 사람들은 창립 교인들이라는 말이다. 여러 풍파 속에서 25년의 세월을 지켜온 교인들은 다음과 같았다. 이후 근속상은 2008년까지 계속되고 그친 상태다. 바꾸어 말하면 1983년 이후로 오랫동안 새로운 교우의 등록이 없었거나 중간에 등록한 사람들은 떠났다는 이야기다.

<역대 25년 근속상 명단>

김종근 김성희 문영조 문명미 신영식 신은옥 이진수 이정성 정암섭 백시옥 문병옥 민양주 박노철 박선영 정대희 정일숙 (2000년)

강희장 강예원(2002년)

유한종 유경숙 김순옥(2003년)

박명필 양만국 양경옥 이수옥(2004년)

유성일 유정숙(2005년)

구우인 구용숙 이정수(2006년)

박철원(2007년)

김인숙(2008년)

또한 창립 25주년 기념예배에서 다음과 같은 임직자들이 안수를 받았다.

장로: 박철원

권사: 문명미 민양주 백정희 신은옥

이효금

집사: 유정숙 정헌진

이 해 남선교회장은 구우인 집사가 여전도회장은 문명미 집사가 맡았다.

3월 19일에는 여전도회와 교육부 주최 로 ‘변화하는 흐름 속의 사랑’ (강사 신수진 박사) 이라는 특강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김목사가 한국에서 온 지 몇 해 되지 않은 때라 교환 교수나 연구차 오는 김목사의 지인들이 교인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들이 주로 특강 강사를 맡아 주었다. 조금씩 변화하고는 있었지만 교세가 하루 아침에 성장하지는 않았고 일부 교인들의 불만도 쌓여 갔다. 이 과정에서 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몇몇 장로 집사 가정이 교회를 떠났다. 교회와 김목사 모두에게 큰 타격이었지만 나머지 교인들은 냉정할 정도로 이 위기를 더 이상 증폭시키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해 5월 지휘자 백정희 권사가 이화여대 음대 동문 합창단을 지휘하던 중 공연장에서 쓰러져 별세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신문기사다.

After School Program은 노회의 LuLu-Stevens Fund를 받았고 학생수는 조금씩 늘어갔지만 담당자들의 피로도 쌓여가고 있었다. 6월 4일에는 주일학교 어린이 성가대가 조직되었다.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가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Big Bear 장로교 수양관에서 열렸다. 10월부터는 Youth Group 영어예배가 복원되었다.

어린이 성가대는 10월 13일 Wilshire 장로교회에서 열린 Hollywood Wilshire Cluster 모임에 초대받아 찬양을 한다. 또한 12월에 있었던 라디오 코리아 주최 어린이 캐롤 경연대회 참석해 동상을 차지 한다.

행사 중심의 2000년대 기록

2001년 1월 21일 교회 창립 26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임직식을 거행해 다음과 같은 제직을 안수했다.

집사: 김복수 조현목

남선교 회장은 구우인 집사가, 여전도 회장은 민양주 권사가 맡았다.

2월 25일을 평화 주일로 정해 설교와 설교에 이은 ’한반도의 평화정착전략’이란 제목의 특강을 연세대 교수 노정선 박사가 진행했다.

3월 11일에는 송윤주 전도사가 청년부 전도사로 부임해서 4월부터 예배 전 찬양을 청년부와 함께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예배 음향장비를 전자 음악 중심으로 교체한다. 2001년에 자리잡은 예배 전 찬양은 처음에는 낯설어들 하면서 적응을 못했으나 지금은 Youth Group과 어른들이 함께 하는 소중한 순서로 자리잡았다. 자녀들이 커 가면서 연주 수준도 일취월장해 갔고 지금은 모두가 은혜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으로 인정받고 있다.

6월 22일(금) ~ 24일(일)까지 샌디에고 연합장로 교회 홍춘만 목사를 강사로 ‘말씀으로 살리라’는 주제로 신앙강좌를 열었다. 주일학교 여름 캠프가 7월 27일(금) ~ 29(일) 오후 7시 까지 Alpine Meadow Camp에서 열렸다. 또한 여전도회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샬롬 장애인 선교회에 헌금하는 등 최선을 다해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9.11이 일어났을 때는 전교인이 헌금에 참여해 노회에 전달했다.

9월에는 정에스더 전도사께서 사임함으로써 힘들게 진행해 오던 평화의 공부방도 접게 된다.

2002년 1월 20일에는 평화의 교회 창립 27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은 임직자들을 안수했다.

장로: 구우인

집사: 김노순 김해룡 유철균

남선교회장은 이정수 집사가 여전도회장은 이정성 집사가 맡았다.

남선교회 등반대회, 여전도회 주최 성가경연대회, 골프대회 등을 가짐으로써 교회는 주요 교인 가정의 이탈에도 동요 않고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새로운 교인들이 지속적으로 등록했지만 그들의 정착율도 높지 않았다.

김인숙 장로가 말하는 교회 분위기가 변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목사도 교인들도 현상 유지를 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2003년 1월 19일 평화의 교회 창립 28주년 기념주일예배로 드렸다. 남선교회장은 이정수 집사가 여전도회장은 구용숙 집사가 맡았다. 주일 예배 전에 장로들이 진행하던 성경공부가 한동안 없어졌다가 9월부터는 예배 후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 격주로 성경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2004년은 30주년을 준비하는 해로 삼고 이정수 집사가 남선교회장을 맡았고 강기영 집사 여전도회장을 맡았다. 선교위원회에서는 거리선교회와 함께 1년에 4번씩 홈리스 사역에 동참하기로 결정했고 지금도 그 사역은 지속되고 있다. 5월 9일 예배 중에는 북한 용천 지역 열차 폭발 사고로 인한 동포 돕기 헌금을 거두어 적십자사에 전달했다. 11월 21일 추수감사주일 에는 미국장로교 총회장을 지내고 당시 Union 신학교 교수로 있던 이승만 목사가 설교를 전해 주었다.

2005년은 평화의 교회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1월 23일 주일에 3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25년 근속상과는 별도로 30주년 공로상을 다음과 같이 시상했다.

이창식 이상지 김종근 김성희 문영조 문명미 문병옥 백시옥 신영식 신은옥 이진수 이정성 정암섭 정일숙

그날 오후에는 30주년 기념 음악제를 열었다. 성가대(지휘 안정화)와 소노로스 중창단, 평화의 교회 어린이 Chamber Orchestra, 피아노 연주(김현진 ) 등의 순서로 채워졌다.

유철균 집사가 남선교회장으로 강기영 집사가 여전도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선교위원회에서 북한 구호 단체인 등대 복지회에 선교비를 지원했고, 여선교회에서는 카트리나 태풍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즈 한인 교회에 키보드를 기증했다.

그 해 10월 15일 명예목사인 이창식 목사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후임 목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어떤 형태의 개입도 하지 않던 꼿꼿한 신사였다. 1927년생으로 세상을 떠나기에는 다소 아까운 나이였다.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교인들이 모두 슬픈 마음으로 고인을 보내 드렸다.

2006년도 1월 22일에는 창립 31주년 기념주일 및 권사 집사 임직식을 열고 다음과 같은 제직을 안수했다.

권사 : 강예원 구용숙

집사: 김선남 김혜선 유영실 조언정

남녀선교회 회장은 지난 해에 이어 연임되었다.

이 때부터 20대~30대를 중심으로 하는 청년 모임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김성회 전도사(당시 평신도)를 중심으로 하는 성경공부에 청년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이 모임은 청년부 모임을 삭개오회로 바꾸어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2005년 교회를 처음 찾은 김성회 전도사(현재 한국에서 국회의원 보좌관을 재직)는 평화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 이듬해 세례를 받고 2007년 PCUSA 산하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M.Div과정에 진학해 졸업한 뒤 한국으로 귀국했다. 평화의 교회에서 사역 중에 청년회와 교회의 사회선교 사역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해 중고등부 학생들이 아리조나 나바호족 거주지의 단기선교에 참여하자 단기선교에 참여하지 않는 어린이부 학생 가정을 위한 부모자녀 수련회가 23일 – 25일까지Desert Hot Springs Miracle Resort에서 열렸다.

9월 3일에는 청년선교회 주최 가족 탁구대회가 열렸고 이 행사를 위해 남선교회에서 탁구대를 기증했다. 11월 김성환 목사가 사임했고 김건수 목사가 협동 목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12월 9일에는 청년선교회 주최로 3가와 웨스턴에 있는 윌셔장로교회 주차장에서 바자회가 열렸다. 이 때 마련된 기금으로 청년선교회에서는 교회 간판을 제작하는 등 교회를 위해 수익금을 사용했다.

2007년 김복수 집사가 남선교회장을 구용숙집사가 여전도회장을, 이윤정 교우가 청년선교회장을 맡았다. 5월 20일에는 청년회 헌신예배로 하덕규 집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간증집회로 드리게 된다. 교회학교 어린이들은 6월 27일–29일까지 112가와 벌몬 지역에서 있은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참여한다.

7월 1일 라티노 교회가 교회 건물을 임대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교회 재정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게 된다. 8월에는 여전도회에서 샬롬 장애인 선교회에 훨체어 구입 헌금을 전달했다. 9월 28일(금) – 30일(일)까지 김복남 전도사(세브란스 병원 원목)를 강사로 사경회를 갖는다.

10월에는 박종화목사(청장년부)와 양경숙전도사(아동부,한글학교) 부부가 부임했다. 12월 23일 성탄주일저녁 예배를 태평양 노회 소속 교회인 South Bay 장로교회(담임 하워드 김목사) 에서 함께 드렸다.

2008년 1얼 20일에는 교회창립 33주년 기념 예배와 장로 집사 임직예배를 드리는데 이때 임직된 제직은 다음과 같다.

장로: 김복수 조현목 집사 : 황호 이윤정 최수진

또한 남선교회장에는 김복수 장로가, 여전도회장은 조언정 집사가 , 청년선교회장은 김용호 교우가 맡았다.

2008년부터 김성회 전도사가 선교간사라는 이름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교회가 사회선교로 눈을 돌리게 된다. 5월 4일에는 주일학교 학생들이 노회 다른 교회들과 함께 LA County 자원 봉사일인 Big Sunday에 참여했고, 중국 쓰촨성 지진 피해 구호 헌금을 교단에 보낸다.

2008년에 김기대 목사는 PCUSA 남가주 하와이 대회 산하 한인교회 협의회 회장으로 1년간 봉사하게 된다.

2009년 1월 18일 교회 창립 34주년 기념주일을 드렸고 그 해 남녀 선교회장은 연임되었고 김윤희 교우가 청년선교회장을 맡았다.

2월 8일에는 김그레이스 전도사 안수 예배가 태평양 노회 주관으로 열렸다. 청년선교회는 삭개오회를 이름을 바꾸고 교회와 사회를 위한 헌신을 다짐하게 된다.

그 해 6월 1일부로 예배 처소를 임마누엘 교회 웨스트민스터 홀로 옮겨 9일부터 주중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고 목요 찬양예배도 신설되었다. 서기남 목사가 협동 목사로 교회를 돕다가 11월 노스캐롤라이나 한인교회로 부임한다. 또한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대학부가 새롭게 조직되어 김민하 군이 회장을 맡았다. 11월 22일에는 신광은 목사를 강사로 ‘메가처치 논박’이란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2010년 1월부터 각 연령대별로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1월 17일 삭개오 청년회는 하루 금식을 통해 엄청난 지진 피해를 입은 아이티를 위한 구호헌금에 동참했다. 1월 24일 창립 기념 주일에 아이티 구호 헌금을 드려 미국장로교 재난구호부(PDA)에 전달했다. 2월 14일 주일에는 나눔동산에서 전교인 수련회를 열었고 김기대 목사와 박지호 교우는 2월 18일부터 24일까지 종교평화협의회 후원으로 대지진 참사를 겪은 Haiti구호 활동에 참여했다. 이해 남선교회장은 김선남 집사가 여전도회장은 조언정 집사가 맡았다.

5월 30일 삼위일체주일로 한완상 전 적십자사 총재를 강사로 평화기원예배를 드렸다. 6월 20일 일 박종화 목사 사임하고 제주 동부교회로 부임함에 따라 7월에 조영랑 목사(양혜련 사모, 민서, 민혁) 가정이 부목사로 부임한다.

6월 27일에는 남선교회 주최 성경퀴즈대회(사사기)가 있었고 10월 10일에는 한글날을 기념하여 ‘한글의 숨은 숨결’이라는 신영균 장로의 특강이 있었다. 12월 23일 목요예배 때는 ‘바람직한 대북선교’라는 양정지건 선생(한빛누리 팀장)의 강의가 있었다.

2011년에는 강동주 김용호 장혜진이 집사로 안수되었고 기존의 남녀 선교회를 해체하고 각 연령대별로 신도회를 재편했다. 연령대별로 재구성된 신도회 첫 임원은 다음과 같았다.

장년신도회 회장: 문영조 총무: 신영균

(후에 이름이 길동무회로 바뀜)

두나미스회 회장: 유철균 총무: 김현출

삭개오회 회장: 강미란 총무: 이재경

5월 10일 주일 오후 5시에는 38주년 기념으로 평화의 울림 음악회가 열려 약 300여명의 회중이 참여해 수준 높은 음악회를 열었다.

교인들 사이에서는 임마누엘 교회가 불편하다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교인 의견 수렴을 위한 Town Hall Meeting이 5월부터 몇 차례 열리게 된다.

6월 14일에는 서울대학교 물리 천문학부 교수인 우종학 박사를 강사로 ‘우주의 역사에 나타난 창조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연다. 또한 6월 30일 목요 예배에는 김동문 선교사를 강사로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바라 본 중동의 민주화’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열었다.

그 해 집사회와 Town Hall Meeting의 건의대로 새번역 성경과 새찬송가로 교체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11월 6일 주일 예배를 끝으로 임마누엘 교회를 떠나 다시 본교회로 돌아 오게 된다.

2012년 1월 22일에 교회 창립 37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면서 아래와 같은 임직자를 안수했다.

권사: 이혜정 채혜자

집사: 고선화 김양수 김은숙

김인숙 장로가 길동무회장을 이만섭 전도사(당시 집사)가 두나미스회장을, 강제니퍼 집사가 삭개오회 회장을 맡았다. 고주열 목사가 부목사 겸 성가대 지회자로 부임했고 김미향 교우는 미술반을 열어 미술을 지도해 주었다.

4월 22일에는 안태형 교우(정치학 박사)가 ‘북한 핵 문제를 중심으로 김정은 체제하 북한의 대내외 정책과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주변국들의 대응전략’에 대해 특강을 했다.

8월부터 헌화의 명칭을 ‘제단의 꽃’ 에서 pro1917 flower로 바꾼다. Pro1917 flower란 잠언 19:17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에 근거하여 매주 드리는 제단의 헌화 헌금을 홈리스 급식봉사에 돌리자는 취지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10월 17일에는 이웃 교단을 이해하는 예배로 정해 성공회 교회 김동진 신부가 설교를 맡았다. 12월 9일에는 평화의 교회 38주년 기념회지인 ‘평화의 울림’이 출간되었다.

2013년은 ‘성숙과 회복’을 표어로 시작되었다. 이 해 부터 이만섭 전도사께서 협동 전도사로 자비량 사역을 시작했다. 1월 11일에는 김기대 목사 저서 ‘감독도 모르는 영화 속 종교 이야기’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이 도서는 2012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된다.

1월 20일에는 교회 창립 38주년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안수했다.

권사: 윤제니 집사: 채승학 김윤경

채희탁 교우가 길동무 회장을 고선화 집사가 두나미스 회장을 신서윤 교우가 청년회장을 맡았다. 김성회 전도사가 한국으로 귀국함에 따라 Youth group 교육간사로 임수빈 선생이 부임했다. 또한 중국어 반을 개설해서 신서윤 교우가 한국 귀국 전까지 지도했다. 5월 19일에는 다른 교단 이해하기 두번째 시간으로 메노나이트 허현 목사가 설교를 맡았다.

6월 2일 주일예배후에 문성근(전 민주당 상임고문)선생의 ‘내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말한다’라는 제목의 특강이 친교실에서 열렸다. 10월에는 인문학 독서모임인 평화서당이 개강되어 격주 목요일 저녁에 모이게 된다.

11월 7일에는 도서 문화 위원회 주최 한국사 퀴즈대회가 열려 세종대왕을 주제로 열띤 경연을 벌여 모든 참가자들에게 장학금 및 부상을 시상했다

2014년1월 26일 창립 39주년 기념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장로 권사 집사 임직식 거행하는데 명단은 다음과 같다.

장로: 김용호 권사: 유정숙

집사: 강미란 김미향 안태형

신도회는 2014년 신도회 임원은 문명미 권사(길동무) 채승학 집사(두나미스) 청년회(강제니퍼 집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청년회는 삭개오회에서 다시 청년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5월 25일 주일 오후에는 두나미스 주최로 ‘재미 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의 저자 신은미씨를 초빙, 북한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강연을 계기로 신은미 선생과 정태일 선생이 교회에 등록한다.

5월에는 교회 40주년 기념위원회를 아래와 같이 구성했다.

예배 준비위원: 구우인 조현목 유철균

음악회 준비위원: 신영균 김인숙

기념사 편찬위: 문영조 유한종 김용호 성기욱

7월 27일에는 최재영 목사의 ‘북한 교회 이야기’ 특강이 있었고 8월 10일은 평화통일 주일 로 지키면서 예배 후에 정연진 선생(AOK 대표)을 강사로 ‘한국전쟁과 평화의 의미’라는 강연을 가졌다.

2015년 1월 25일에는 창립 40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김은숙 장로, 성기욱 이내운 집사 임직식, 문영조 장로 장로 은퇴예배를 가졌다. 축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여해서 참으로 오랫만에 100여명 이상이 40주년 기념 사진 촬영에 임했다. 이용제 장로길동무회장을 안태형 집사 (현재는 이내운 집사)가 두나미스회장을, 강제니퍼 집사가 청년회장을 맡았다.

8월 15일에는 두나미스 주최로 ‘같은 시대 다른 삶’이라는 광복 70주년 전시회를 개최해 연말까지 지속하기로 했다. 민족문제 연구소에서 제작한 이 자료는 일제하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지조를 지킨 사람과 변절한 사람을 대비하는 형식으로 구성 되어 있는 자료다. 교인들은 이 전시회를 통해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되살렸다. 10월 4일에는 40주년 기념 음악회를 열고 창립 40주년 기념지를 발행한다.

음악회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전능왕 오셔서, Shalom Chaverim, 조율, 영광의 주님, 오라 찬양하세 (평화의교회 성가대, 지휘 송종현 반주 김현진, 조언정) You Raise Me Up (solo 고주열)

Canon in D (Flute/Violin 조예진 이애리)

Opus 87 IV. Finale (Clarinet/Trumpet/Trombone 조예린, Cathy Ryan, David Ryan)

예수 사랑하심은, 그 날 곧 오네 (평화의교회 남성중창)

그것만이 내 세상 (Guitar 이욱종)

예수전 (판소리 이내운)

산촌, 그리운 금강산 (Soprano 신은미)

미래위원회와 임마누엘 시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평화의 교회는 내적 변화를 통한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교단 내 미국 교회와의 합병을 모색하게 된다. 마침 임마누엘 장로교회(담임 Frank Alton 목사)와 평화의 교회는 지향하는 바가 잘 맞았다. 임마누엘 교회에는 당시 열린문 장로교회(이하 열린문)가 거액의 임대료를 내고 사용하고 있었지만 열린문은 교회를 건축해 임마누엘 교회를 떠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임마누엘 교회로서는 열린문으로부터 상당한 임대료를 받아 교회 재정 적자를 해소하고 있었지만 열린문이 나가면 프랭크 목사는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진보적’인 목회를 해 보고 싶어했다. 그에게도 평화의 교회는 적절한 파트너였고 평화의 교회에게도 그들은 좋은 파트너였다. 노회에서도 후원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당시 부동산 호황을 맞으면서 임마누엘 교회는 주차장 부지에 건물을 올려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므로 교세가 줄어들 대로 줄어든 임마누엘 교회였지만 다음 파트너의 기준은 ‘임대료’가 아니라 ‘신학의 일치’였다. 2002년 두 교회는 미래위원회를 조직해 합병을 위한 길고 지루한 대화를 시작한다.

미래위원회 시작 7년여 만에 열린문이 임마누엘을 떠나자 평화의 교회는 2009년 6월 1일부터 임마누엘 교회로 예배 처소를 옮기기로 했다. 옮기기까지 당회는 노회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면서 예배 처소 이전이 합법적인 절차 속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도를 받았다. 교회 건물의 매매가 아닌 이상 공동의회 결정 사항이 아니라 당회 결정사항이라는 노회의 자문이 있었고 당회는 7년 동안 교인들에게 설명이 충분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았다. 설마 하며 논의과정을 지켜 보던 교인들 일부가 이전을 거부했고, 노회에 찾아가 재산분할을 요구했다. 노회가 예배처소 이전에 어떠한 불법성도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자 일부 장로 집사 가정이 교회를 떠났다. 김목사 부임 초기에 일어났던 이탈보다 규모는 더 컸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남은 교인들은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고 동요가 없었다. 일부 젊은 교인들의 동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지속적인 설명에 모두 동의해 주었다.

문제는 평화의 교회 내부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임마누엘 교회의 주차장 개발 계획은 경제위기로 물거품이 되었고 평화의 교회가 열린문 만큼은 아니어도 우리 교회로서는 부담하기 어려운 렌트비를 부담해 주길 원했다. 거대한 임마누엘 교회의 유지와 임대 관리는 그 교회 당회의 손을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무적인 접근으로 일관하던 임마누엘 건물관리인의 안중에 두 교회가 약속한 미래 지향적인 비전은 없었다. 우리 교회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평화의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매일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는 등 위치가 좋은 곳에서 생존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렌트비에 따른 재정 적자와 교인들의 불만은 쌓여 갔다. 좋은 위치였기에 매주 새로운 교인들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막대한 렌트비를 내면서도 건물 사용에 제한이 많았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새로 오는 교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여력이 없었다. 처음 의도와는 달리 완전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LA에서의 추모 집회 장소가 필요했다. 많은 사람이 모이기에는 임마누엘 교회가 적격이어서 우리가 임대한 예배실을 추모식 장소로 빌려 주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평화의 교회는 80년대 해람장로교회로 알려진 이후 다시 진보적인 교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김목사의 사회 활동으로 어느 정도 인터넷 상에서는 알려져 있는 상태였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임마누엘로 이전하자마자 교회의 성격을 규정해 버리는 사건으로 작용했다.

사실 당회원들은 위치가 좋은 새로운 곳에서 평범한 목회를 통해 교회가 어느 정도 수혈된 후 임마누엘 교회와 보조를 맞춘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추모식을 통해 평화의 교회를 알게된 일부 가정이 교회에 등록을 했다. 하나님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교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또한 임마누엘 교회에서 영어 예배를 드리던 일부 한인교인들이 평화의 교회로 옮겨오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러 저러한 연유로 성실한 교인들이 교회에 새롭게 등록을 했다. 본래 위치에 있었다면 찾아 올 수 없는 교인들이었다.

임마누엘 교회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프랭크 알튼 목사가 사임하면서 미래위원회가 처음 발족할 때의 약속도 사라져 버렸다. 본래 두 교회의 동거 실험 기간이 3년이었는데 2011년 11월 2년 5개월 만에 본래의 교회로 돌아왔다.

이 기간동안 성숙한 교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잘 참아 주었다. 누추해 보이던 본교회가 안온한 공간이라는 감사함도 생겨났다. 임마누엘로 옮기기 몇 해 전부터 창립 세대의 부모세대가 별세하면서 교세는 많이 축소되어 있었다. 게다가 일부 핵심교인들이 이전에 반대하면서 교회를 떠나 교회는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임마누엘 시절에 등록한 교인들은 대부분 함께 돌아와 주었다. 절반의 성공이었던 셈이다.

교회의 사회 선교

2002년경부터 김목사는 개인적으로 종교간의 대화운동인 종교평화협의회 활동과 여러 시민 운동 과 통일 운동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로 인해 교회의 이름과 성격이 조금씩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활동에 대해 일부 반대의사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후원해 주었다.

종교간의 대화 운동을 하던 김기대목사는 2004년 6월 25일 – 30(일) 스리랑카에서 열리는 아시아 종교평화회의 참석해 북한 대표부 및 아시아 지역 종교지도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2006년 김기대 목사는 등대 복지회 소속 목회자들과 함께 방북해서 북한 빵공장과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2007년부터는 사회 선교 간사 제도를 도입해 교회와 시민 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게 했다.

교회는 탈북자 지원회와 연합으로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해서 이재경 교우가 성인들에게 컴퓨터 기초를 가르쳤고, 탈북 가정 자녀들에게는 인공지능 로봇 교실을 열어 첨단의 교육을 제공했다. 교회는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탈북 자녀들에게 모든 기자재를 공급했고 강사는 이동철박사(온누리교회)가 맡아 주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은미 교우를 비롯한 많은 강사들의 북한 바로 알기 위한 강연을 통해 평화의 교회는 통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2015년부터는 두나미스회 중심으로 LA기독교 윤리 실천운동본부의 사역 중 하나인 북한 빵공장 후원에도 참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국회의, LA 나비모임 등의 회원들도 교인으로 등록해 평화의 교회는 명실상부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정의 평화 운동의 모판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의 성격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민 사회 활동을 하는 교인들은 교회와 시민 운동을 혼돈하는 일이 없이 교회에서는 성실한 교인으로 헌신했다. 진보적 교인 보수적 교인 할 것 없이 평화의 교회 교인으로 서로 교제하면서 처음의 낯섦 때문에 생겨났던 벽도 차츰 사라져 갔다.

문성근 씨 초청 강연회나 ‘같은 시대 다른 삶’ 전시회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추진된 일이었다.

평화의 교회 역사에서 홈페이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터넷 홈페이지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인 2002년부터 평화의 교회는 교세에 비해 비교적 일찍 홈페이지를 열고 사회 선교 수단으로 삼았다. 지금 평화의 교회 홈페이지는 김용호 장로의 노력으로 인터넷 공간에서는 유명한 교회로 자리잡게 되었다.

문화사역

평화의 교회는 2010년부터 기존의 위원회 조직에 도서 학술위원회(현재는 도서문화 위원회)를 신설하면서 문화사역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매월 5~10여권의 신간이 들어오는 도서관은 일부 교회가 벤치마킹을 해 갈 정도로 평화의 교회 자랑이 되었다. 천편일률적인 신앙도서 중심의 장서가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 중심으로 신간이 공급됨으로써 교인들에게 많은 인기를얻고 있다. 이 일에는 도서문화위원회 창립 때부터 위원장을 맡아온 신영균 장로의 공이 컸다. 2011년 5월 평화의 울림 음악회를 비롯, 2012년 38년 회지 발간, 한국사 퀴즈대회, 미술반 등 도서문화위원회의 후원아래서 이루어졌다.

특히 2011년 5월 15일 열린 평화의 울림은 300여명의 관중이 참여할 정도로 큰 음악회였다. 또한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공연이 제공되 음악회가 끝난 뒤에도 감사와 찬사가 이어졌다. 이재경 교우의 사회로 진행된 평화의 울림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평화의 교회 성가대, 지휘 박유선 반주 조언정)

• Jazz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노래 김유경, 반주 이대용)

• 소프라노 솔로 O mio babbino caro ( 소프라노 박유선, 반주 김현진)

• 합창 오오 종달새, Shalam Chaverim, 아리랑, 짝사랑, 향수(Kama 여성 합창단, 지휘 송종현 반주 라경희)

• 피아노 Duo Sonata in D Major for Two Piano Duo K448, Mozart (김현진 조언정)

• 판소리 사명, 심청전 중 젖동냥(소리 서훈정, 북 김성이, 피아노 최윤석, 해금 이지선)

• 클라리넷 Clarinet Sonata f minor Op.120 No1., Brahms (연주 이정환, 반주 Stephanie Ou)

• 남성 중창 나의 등뒤에서, 눈물젖은 두만강(평화의 교회 남성 중창단, 반주 이은정)

• 바리톤 솔로 희망의 나라로, 신고산 타령 (바리톤 김무섭, 반주 김현진)

• 소프라노 바리톤 Duo 거룩한 성 (김무섭, 박유선, 반주 김현진)

또한 2012년 12월 발간된 38주년 기념회지 평화의 울림은 신앙, 수필, 여행기, 영화평 등 다양한 분야의 글들을 통해 평화의 교회 교인들의 관심사를 밖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2013년에는 김기대 목사가 인도하는 인문학 교실 ‘평화 서당’ 이 시작되었다. 2009년에 미주뉴스앤조이 아카데미에서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강의한 경험을 살려 외부 참석자들에게 개방된 평화서당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평화서당에서 공부한 책은 다음과 같다.

로랜드 보어, 성서와 대안 좌파

야곱 타우베스 , 바울의 정치신학

크리스토퍼 래시, 진보의 착각

정일권, 우상의 황혼과 그리스도

데이비드 파커, 혁명의 탄생

도미티크 핀켈데, 바울의 정치적 종말론

알베르토 토스카노, 광신 (2015년 9월 시작)

주일학교 이야기

송윤주 전도사가 사임함에 따라 2002년 9월부터 주일학교에 임윤종 전도사가 부임해서 어린이 오케스트라를 조직한다. 적은 수의 인원이었지만 다양한 악기를 지도할 줄 알았던 임전도사의 노력으로 오케스트라는 주일학교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2003년을 끝으로 임윤종 전도사가 사임하고 강제니퍼 선생이 부임한다.

강제니퍼 선생은 교육전도사가 아니라 임전도사가 기반을 다져 놓은 어린이 오케스트라를 지도하기 위해 부임했다. 따라서 강선생에게 주어지는 급여는 파트타임 교사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갓 대학을 졸업한 강제니퍼 선생은 지금 2015년까지 헌신적으로 교회에 봉사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이 출판되기 일주일 전인 2015년 9월 말 결혼하면서 올해 연말에 한국으로 이주한다.

강제니퍼 집사가 오스트레일리아에 Working Holiday 비자로 일하러 가면서 교회와 이별을 하게 되었을 때 모두 아쉬워 했는데 1년 반 만에 또래 그룹도 많지 않은 우리 교회로 다시 돌아왔을 때 교인들은 한결같이 기쁨으로 반겼다. 최근 강제니퍼 집사는 자신은 교인이라기 보다는 파트타임으로 채용된 음악선생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자신에게 교회가 장학금이라며 큰 후원을 해주었다고 회고 했다. 예산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평화의 교회는 베푸는 교회였고 떠나도 돌아오고 싶은 교회였다.

어린이들의 숫자가 많지 않아 자체적으로 여름 성경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어려워 질 때쯤 마침 우리 교회가 속한 남가주 하와이 대회 소속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합 수련회 프로그램이 대회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장소는 빅베어에 있는 PCUSA수련관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나뉘어진 프로그램으로 각 1주일씩 여름 방학 동안 진행되었다. 우리 교회는 2003년부터 자체 프로그램 대신 이곳에 자녀들을 보냈다. 참가비의 50%는 교회가 장학금으로 지급하는 형식이었는데 장학금 지급이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보다 예산상으로도 절약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더 알찬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평화의 교회 주일학교 여름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초등학교때 처음 참석했던 김준하 군(김기대 목사 차남)은 그 프로그램의 교사가 되어 해마다 여름이면 3주씩 참여해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2004년 1월 4일에는 김성환 전도사 부임하고 2005년 1월부터 아동부와 EM예배가 분리되고 EM사역자로 김 그레이스 전도사를 별도로 임명했다. 김성환 전도사의 아내인 김그레이스 전도사는 2009년 2월 8일 우리 교회에서 안수를 받아 미국장로교 태평양 노회 정회원으로 활동하다가 미군 군목으로 사역을 시작 2015년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하고 있다.

2006년 7월에는 중고등부가 몇몇 교회 청소년들과 함께 아리조나 주 나바호 미국 원주민 지역 선교에 참여했고, 2007년 7월에는 Indiana Purdue 대학에서 열린 미국장로교 청소년 대회에 김민하 조예린 김한나 학생이 참가했다.

미국장로교는 다양한 기금을 조성해 지역 교회를 돕고 있었는데 우리 교회는 교단으로부터 펀드를 받아 지역 청소년 교육을 위해 인공암벽을 설치하게 된다. 산악인 출신의 유한종 집사가 지도를 맡았고 우리 교회 자녀들 뿐 아니라 JOY 선교회의 장애를 가진 청소년들도 이 시설을 자주 이용했다. 의미 있는 시설이었지만 노후함에 따라 2014년 철거한다.

평화의교회

Updated on 2015-09-08T23:29:29+00:00, by Yongho Kim 김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