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서신- 베이컨의 난

The_Burning_of_Jamestown (1)1676년 당시 버지니아 총독의 통치 방식에 문제를 느낀 부유한 농장주 베이컨(Nathaniel Bacon)이 백인 자유인, 백인과 흑인으로 구성된 계약직 노동자, 흑인 노예 등 400명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른바 ‘베이컨의 난’입니다. 이 ‘난’의 구성원을 보면 백인들 중에서도 계약직 노동자들이 있었고 흑인들은 계약직 노동자와 노예계급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에 종사하는 백인 하인들도 있었고 흑인들도 모두 노예가 아니고 계약직 흑인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17세기 미국의 노동 계층은 흑백과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서로 술 주정도 받아 주는 그런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이들 모두 농장주의 반란 권유에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 있었습니다.

베이컨의 난에 놀란 버지니아 정부는 흑백 연대를 막기 위해 흑백 차별 정책을 시행합니다. 같은 죄를 지어도 백인 노동자들에게는 관대한 반면 ‘열등한’ 흑인들에게는 ‘사지절단형’과 같은 참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에드먼드 모건(Edmund Morgan)은 미국의 흑백차별이 피부색의 이질감에서 온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부유한 자본가가 가난한 노동자와의 계급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고안한 통치구도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돈을 더 벌기 위해 흑백차별을 조장했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이 논리를 뒷받침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 두 명이 무저항 상태에서 ‘총살’을 당했고 이에 저항하는 퇴역 군인이 백인 경찰만 겨눠 사살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냥 피부색만 다른 것인데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돈’의 문제가 우리를 지배하다 보니 모두 거칠어져 있습니다. 혹자는 흑인민권운동이 일어나던 1960년대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재물(맘몬)과 패권을 향해 치닫는 세계를 멈추어 서게 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 기독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2016년 7월 10일 주보)

이미지: Engraving captioned “The Burning of Jamestown” showing the burning of Jamestown during Bacon’s Rebellion (1676). From Illustrated School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Adjacent Parts of America: from the Earliest Discoveries to the Present Time (1857) available at the Internet Archive. (Public Domain)…

목회서신 – 안타까운 죽음이 없는 세상을 바라며

지난 12일 새벽 올랜드 나이트 클럽에서 일어난 참극으로 마음이 편치 않던 중에 지난 주간에도 아픈 두 죽음이 있었습니다.

41살의 조 콕스 영국 노동당 하원의원이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콕스 의원은 영국의 브렉시트(British Exit) 정책의 반대 입장에 서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브렉시트란 유럽연합(EU)으로부터 영국이 탈퇴를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오는 23일 영국에서 찬반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유럽연합이 처음 출범할 때는 하나의 유럽이라는 공동체의 정신을 표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럽내 부유한 나라들을 중심으로 우리의 돈으로 가난한 나라를 도울 수 없다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경제 사정이 안좋은 나라들의 이민자가 해를 입힌다는 우려가 영국으로 하여금 브렉시트의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반면 조 콕스 의원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할 수 없다는 철학에 따라 브렉시트 반대 운동을 해오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자국의 이익보다 이웃을 향해 열려 있던 한 젊은 여성 정치인의 별세가 더욱 아픈 까닭입니다. 아내의 사망후 남편 브렌든 콕스는 성명을 내 “증오는 신념이나 성취, 종교가 아니다”며 “그녀를 숨지게 한 증오에 맞서 싸워야한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에서는 세월호 구조 활동을 하던 한 잠수사가 석연치 않은 죽음으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김관홍(43)씨는 세월호 사고 당시 자원봉사로 나서 많은 시신들을 수습했습니다. 세월호 청문회 당시 거짓으로 일관하던 관리들을 향해 일침을 날리기도 했던 그는 그때의 기억으로 힘들어 하다가 안타깝게 젊은 목숨을 마감했습니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사라지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6년 6월 19일)

Image: Vigil in support of the victims of the 2016 Orlando nightclub shooting, Washington, D.C. (CC BY-SA)…

목회 서신 – 전쟁에 나서는 원효의 용기

2016년 5월 29일 목회 서신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선우 작가의 ‘발원’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원효와 김춘추(신라 무열왕)의 딸인 요석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입니다. 원효의 ‘효’는 새벽 효이고 요석의 ‘석’은 저녁 석이니 모든 것이 시작하는 새벽과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저녁의 사랑 이야기가 소설의 주 내용입니다.

원효에 대한 자료는 ‘삼국유사’를 비롯해서 몇 안되기 때문에 소설의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상상력 중에 백제와의 전쟁에 나선 원효의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소설에 따르면 원효를 총애하던 선덕여왕은 백제와의 전쟁에 승군을 모아 앞장 서달라고 원효에게 부탁합니다.

자신을 알아봐주는 왕의 부탁, 그것도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처한 조국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원효는 선덕여왕에게 자기를 비롯한 승군은 참전은 하겠으나 무기는 잡지 않고 위생병으로 참여하겠으며 위생병의 구호 대상에는 백제병사도 포함시켜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선덕여왕의 표정은 어그러졌지만 원효를 총애한 왕답게 허락하게 됩니다.

메모리얼 데이입니다. 국가는 지킬만한 숭고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따라서 그 일을 위해서 희생한 이들을 추모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평화와 용서입니다. 잔뜩 독이 오른 국가주의 앞에서 승려로서 자신의 신앙에 따라 용기있게 나선 원효의 태도가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 필요한 가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늘 이런 상상을 합니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남북 병사들을 남북의 국립묘지에서 각각 이장해서 비무장 지대에 화해의 묘지를 만드는 날이 오기를요…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의 저서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에서 자신이 청년 시절을 보내던 사우스캐롤라이나(SC) 그린빌의 기억을 되살립니다. 1963년 어느 날 보수적인 SC주에서 마침내 일요일에 영화관을 열었습니다. 극장이라는 세속적인 공간이 미국에 자리잡은 지 오래되었어도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이 대다수인 SC에서 극장은 ‘주일은 쉽니다’의 원칙을 지켜왔었는데 결국 영화관을 주일에 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당시 기독교인들은 매우 안타까워 했었다는 겁니다. 당시 그린빌에는 주일 아침만 되면 교회 가는 인파로 인해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시절 분위기를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 세상에서 잘못되어 있는 것들- 그때는 인종차별의 세상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라-에는 눈을 감아 버리고 좋고 의로워 보이는 세상만을 보았다. 부모들은 자녀를 주일학교에 보내 놓고는 만사가 좋고 건전하고 합당하고 또 미국적이라고 믿었다”

지난 주간 SC 주 찰스턴에 있는 흑인 교회에 21살의 백인청년이 총을 난사해 담임목사인 클레멘타 핑크니(Clementa Pinckney) 포함, 9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올해 41세의 클레멘타 목사는 13살에 설교를 시작했으며 23살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최연소 주 하원의윈에 당선된 이력을 가진 흑인 사회 뛰어난 지도자였다고 NY Times는 애도했습니다. 클레멘타 목사는 현재 주 상원으로 의정활동과 목회를 병행하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영화관은 막아 내려고 하고,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신앙교육을 시키려고 하면서, 정작 사회불의는 외면하던 SC 주의 50여년 전 그 생각들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그런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아시안들은 흑인들보다 더 소수자들입니다. 흑인들의 민권 운동 덕분에 그나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들의 희생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더군다나 다수의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권력이라고 ‘성소수자’를 함부로 증오하는 한인 기독교인들과 피부색을 권력으로 생각하는 백인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미국 장로교 이야기

우리 교단 PCUSA 잡지인 Presbyterians Today 신년호는 다음과 같은 통계를 싣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자료라고 생각되어 여기 소개합니다.

* 2012년 기준 미국 장로교 인종 비율
백인 89.9%(1,661,952명), 아시안 3.8% (70,286명 )
African American 3.3% (60,311명), 히스패닉 1.6% (28,931명),
African 0.4 % 0.4% (7,270명), 미국원주민 0.3% (5,923명),
중동 0.1 % (2,442명), 기타0.6% (12,381명)
 
* 다양하지만 그것이 다문화 목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Diverse but not always multicultural). 미국회중 (전체 교회 10,262개) 중 45%가 같은 인종끼리 모이고 있습니다.
백인 4,047개 교회, 아시안 177개 교회
African American 230개 교회, 히스패닉 122개 교회
African 3개 교회, 원주민 55개 교회, 중동 4개 교회, 기타 1개 교회

* 98%의 백인 장로교인이 백인 교인 비율이 80% 이상인 교회에 출석합니다.
0.1 %의 백인 장로교인이 소수 인종 교회(백인 비율이 20%미만인) 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

저는 PCUSA안에서 한인 교회의 위상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Asian 장로교인 전체 비율이 3.8% 밖에 안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Asian 교회에는 타인종을 받아들이는 비율이 높은 것 같습니다전체 교인 70,286명 중에 177개 교회(22,094명)만이 자기들끼리 모이고 나머지 48,000명의 교회는 다른 인종도 수용하고 있습니다.
백인의 소수 인종 교회 출석 비율이 0.1 % 밖에 안되네요. 하기야 우리교회에서는 0.1%도 안됩니다. 새해에는 백인 전도를 해볼까요?…

영화 노아

구약성서의 인물 가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지난 주에 개봉되었고 미주에서는 28일 개봉되었습니다. 미국보다 한국에서 먼저 개봉될 정도로 한국의 영화시장 위상이 커졌습니다. 감독은 대런 아로노프스키로 발레리나 사이의 갈등을 그린 이 그의 대표작입니다. 노아 역은 명배우 러셀 크로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볼 때 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라 그냥 상업영화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성서와 상당히 다르다고 해서 기독교계가 볼멘 소리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21세기에 성서의 이야기가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관심이 되었건 흥미가 되었건 기독교인으로서는 그렇게 불쾌한 일이 아닐 것 같은데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리들리 스캇(대표작 카운슬러) 이 연출하고, 크리스찬 베일이 모세 역할을 맡은 엑소더스도 개봉을 준비중입니다. 바야흐로 기독교 영화가 아니라 성서 소재의 영화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철학에서는 메시아적 개입 또는 메시아적 시간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대 계몽주의 이후로 신을 버린 세상은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을 통해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던 사회주의는 독재로 변질되어 베를린 장벽 붕괴,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뒤안길로 밀려났고, 인간의 건전한 소명의식이 기초가 되었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로 변질되어 세상의 종말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철학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을 넘어선 메시아적 개입이 있어야만 이 세상의 부조리가 해결된다고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직 관람은 못했지만 저는 영화 에서 이런 문제의식만은 발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본질

최근 한국의 야권 정치 세력이 연합을 결정하면서 야당의 핵심이 되는 몇몇 사건을 정강정책에서 빼자고 해 논란이 일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중간지대 사람들까지 포함하기 위해서는 예민한 것을 빼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야당의 기본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반발의 목소리가 더 컸는지 없었던 일로 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정치의 영역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대중성을 빌미로 고유의 것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보곤합니다. 물론 독선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 대중에게 다가서는 전략을 개발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캐나다 출신의 사상가 제임스 코헨이 그의 책 에서 주장한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노선의 수정이 아니라 그 노선의 핵심과 주장에 대한 확실과 실천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들 부시와 케리가 맞붙었던 선거전에서 공화당이 보수 기독교계에 엄청난 공을 들인 반면 당시 민주당 선거 본부에는 기독교를 담당하는 직원이 인턴급 한 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당은 동성애, 낙태, 진화론 등에서 보수 기독교의 표를 얻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는 처음부터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 이후 교회에 어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힐러리 모두 후보 경선 때부터 기도하는 사진을 언론에 노출하면서 기독교계를 끌어 들였습니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교회를 의식해서 교회가 싫어하는 정책을 포기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서적 진리의 전달방법과 실천방법을 고민해야지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21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John Milbank의 신학이 Radical Orthodoxy (진보적 정통주의)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진보성과 정통성이 함께 갈 수 있음을 밀뱅크는 보여 주고 있습니다.…

3.1절에

일본의 천황제도를 지금처럼 만든 것은 이토 히로부미라고 합니다. 그 이전까지의 일본 왕은 구중 궁궐에 있는, 즉 백성들과는 동떨어져 있는 존재였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서양의 왕실제도를 연구한 뒤, 순행을 정레화해서 천황을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천황이 천한 백성들에게 그의 모습을 보인 것은 위신의 하락이지만 그것을 본 백성들은 일본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부강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반면 조선의 경우 일본에 의해 국왕제도가 없어졌음에도 해방 이후 누구도 왕실을 복원하는 데 앞장 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조선의 왕이 국가를 대표하고 국민을 위한 존재라는 의식이 없었다는 것의 반증이라는 겁니다. 왕실은 구중궁궐 속에서 그들만의 삶을 사는 존재로만 여겨졌던 거지요. 19세기 말엽부터 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한 일본의 배경에 이런 기획이 있었건 것을 보면 솔직히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겠지만) 우리의 조상들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3.1절입니다. 침략국 일본은 반성의 기미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종군 강제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신사 문제 등에서 갈수록 후안무치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을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의 자세가 구한말의 그것과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민주 사회에서 국민을 존중하고 그들 속으로 낮아지기는 커녕 부와 권력을 독점한 친일 세력들이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도 반성이나 개선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류를 위조해 제 백성을 간첩 만드는 나라, 공약을 어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지도자, 그것을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르는 백성의 조합이 가져올 파장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나마 3.1 운동 당시에는 기독교가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 앞장이라도 섰는데 오늘의 교회는 어디에 있는지요? …

광신

광신은 지하철 역에서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과 같은 행위, 신앙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재단해 버려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믿음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계몽과 이성이 지배하던 시대에 광신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광신이 큰 부분을 차지했기에 그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탈리아 출신의 좌파 이론가 알베르토 토스카노는 그의 책 에서 광신을 현대의 담론으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사회주의 이론가의 입에서 종교적 근본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광신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듣다 보면 고개가 끄덕거려 집니다.

현대인들은 이성이나 자유 같은 것에 매몰된 나머지 삶의 열정을 잃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동안 현대인들은 합의, 계몽 이런 것들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지켜야 할 진리를 놓쳐 버렸다는 것이 토스카니의 주장입니다. 그의 주장은 결코 이성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선택해야 할 순간 내가 그 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주 한국에서는 조용기씨와 그의 아들이 배임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한국기독교의 근본주의 세력은 든든해서 사회 여론을 여전히 주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비판할 줄만 알았지 그들만큼의 열정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그들에게 지는 이유입니다.…

39주년 기념 주일에

시편 16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

오늘 39주년을 맞는 평화의 교회 성도들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이렇게 아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존귀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말이지요. 1년에도 수 십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교민 사회 현실 속에서 우리 평화의 교회가 39년 동안 작고 약한 상태로도 지속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귀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은총은 그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의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평화의 교회를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교회를 지켜 온 우리 성도님들이야 말로 존귀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성(聖)은 통할 통(通)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설문해자는 “하늘과 통하고 만사에 통하는 것이 거룩함이다. 어떤 일에든 통하지 않음이 없고 널리 크게 변화시켜 평범한 사람들을 뛰어넘는다”라고 풀어 쓰고 있습니다.

우리 평화의 교회 성도(聖徒)들이 이처럼 하나님과 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평범함을 뛰어넘는 사람들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올해도 지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지속시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