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 등반을 다녀와서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유한종 집사
발달 장애우 페루비안 안데스 원정등반
자폐장애를 앓고있는 그들을 두고 무슨 봉사라거나 무위(撫慰)라거나 어줍잖은 보시(普施) 같은 걸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다만, “당신같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평생 등산이라는 게 무었인지도 모르고 살다 길 수 밖에 없는 친구들이다!”라던 발달장애자 토요학교 특수활동 담당목사의 권고를 모질게 외면할 수 없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된 일일 뿐이다.
어쨋거나, 발달장애자토요학교에 등산 커리큘럼이 시작됐고 장애자 혼자 등산에 나설 수 없어 1:1의 자원봉사자가 따라 붙어야 하는 등의 이러저러한 어려움들을 겪어 넘기면서 5년여 동안 이산 저산을 오르내렸다. 처음에는 평지와 판이하게 불규칙한 산악지형을 걷는 자체가 생소하여 한 발자욱 내 딛기도 어려워하던 그들이 아주 조금씩 산행에 익숙해지고 난이도를 올려가는 동안 나도 모르는 새 정도 들었고, 아주 느리지만 나름으로 차곡차곡 산과 자연과 어우러져 감을 보는 감동 또한 적지않았다.
‘발달장애자 등반대 고산원정등반’은 그렇게 그들이 소속돼있는 장애선교센터의 기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꿈과 ‘저들로 하여금 높은 산위에 서서 한번쯤 세상을 내려다 보게 해 줄 수잇으면 좋겠다’ 는 내 막연한 욕심이 죽이 맞아 저질러진 일이다.
마침 우리 교회 마당에 인공암벽이 세워지고, 그 시설이 어떤 경로로든 지역사회 관심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쓰여질 수 있기를 내심 바라던 터에, 장애자 원정 훈련장으로 안성마춤이었고 실제 그들의 담력을 키워 높은 곳으로 오르는 공포를 삭이는데 결정적 역활을 해 주었다.
‘설마, 우리 아이가?’… 그렇게 막연한 꿈이기만 하던 부모들의 의구심이 아주 천천히 관심과 참여로 부풀어가면서 ‘그래 한번 해보자!’ 내 마음도 덩달아 부풀었다. 일단 불이 붙은 장애학교측의 설득력 과 추진력은 놀라웠다. 아무 것도 갖추지 못한 제로상황에서‘우리도 할 수 있다!’, ‘자폐장애우 페루비 안 안데스 원정등반’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불과 몇달 만에 자폐장애자 대원 3명, 자원봉사 대원 2명이 확보 돠었고, 자원봉사 대원 하나가 모자라서 아내 경숙을 반 강제동원하여 나까지 합하여 총원 7명의 원정대가 일단은 꾸려졌다.
막상 시작은 되었으나 이전에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등반인고로 산악계 일원에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 기는 했는데, 일반사람들은 ‘참 좋은 일이다!’ 부축였지만 정작 절실했던 산악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호응은 고사하고 무모하고 위험한 발상이라며 훈련조차 참여는 커녕 거들어 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외로운 훈련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기실, 그들의 염려 반대가 오하려 맞기는 하다. 등반은 꿈 보다는 실제다. 대원들의 부모는 물론 주최측 선교회의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격려가 정신적으로 용기를 줄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산에서는 단 한 발자욱도 가파른 경사를 대신 올라주지도, 단 한 호 흡 가쁜숨을 쉬어주지도, 단 한방울 땀을 흘려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애당초 홀로 부푼 가슴이기에 쫄지는 않는다. 본디 등반은 외롭다.
일반적인 등반대에서는 철저하게 임무를 분담한다. 등반기술, 수송, 장비, 의료, 식량, 기획, 행정, 회계, 기록… 각자의 실수 하나가 등반 전체를 망치기도 하고 때로는 불행한 사고로 연결될 수도
있기에 누구나 자기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팀웤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이 억지 등반대(?)는 빠르게 꾸려지기만 했지, 임무를 분담할 인력은 고사하고 도대체 갖추어진 게 없다. 그냥 일곱의 사람과 일찍이 마련된 $만 있다.
장비를 빌리고 협찬도 받고, 등반계획서를 #A부터 #Z까지 시간 별로 짜고, 중간에 들릴 곳 마다 호텔예약, 등반가이드 계약, 보험 들고, 무얼 먹고, 무얼 입고, 뿐만 아니다. 훈련 나가면 스스로 끝 맷음을 하지 못하는 대원들의 신발끈 매주기 부터 배낭끈 조절까지…. 선배들 말대로 이건 진짜 미친 짖이구나! 싶었다.
훈련을 계속하는 한편, 자폐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해발 5000미터 대의 고도에서 자폐장애자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의 예상 및 대처방안 공부가 숙제다. 몇 다리를 거쳐 정신과 의사 한분과 면담을 할 수 있었다. “누구를 데리고 어디를 간다구요!?” 이 양반, 내 질문이 채 끝나 기도 전에 대뜸 ‘기도 안찬다!’는 표정이다. 우물 파야할 사람은 나니까 참고 의자를 바짝 디밀고 조 언을 바랬지만 계속해서 “글쎄요, 위험하지 않을 까요”만 반복하지 진지하게 얘기를 받아주려 하지 않는다. 등반이란 원래 위험을 각오하고 하는 짖인데… 참고가 될런지 모르겠다면 시답잖게 적어준 www.autism.org가 고작이고 실제 필요한 도움은 얻은게 없다.
‘Autism Spectrum Disorders’ 인터넷에서 $14.95 카드 결제하고 몇편의 논문과 아티클을 뽑아서 딴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지만, 우리가 맞닥치려는 상황에 피가되고 살이될 정보는 콕 찝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도 영·유아기 자폐에 관한 것들 뿐 27, 32, 33살 성년에 관한 정보는 건진 게 거의 없다.
자폐가 ASD(Autism Spectrum Disorders)라 정리된 것도 20세기 들어서이고 지금까지 발생원인도 잘 모르고 똑부러지게 밝혀진 내용이 없다고 한다. 더더구나 Behavior는 저마다, 경우마다 다르고 복합적이어서 치료도 대처방안도 일괄적일 수 없다고.
사회적 상호관계(Social Interaction) 장애
사회적 의사소통(Social Communication) 장애
상상력(Imagination)미달(Impairment) 장애
이 세가지 핵심증상(Triad of impairment)을 기준으로 하고 그 범주에 걸리는 증상을 자폐로 진단 한다고 한다. 이상이 벼락치기 공부에서 알아낸 전부인데, 그 세가지 증상을 모두 앓고있는 대원들을 이제부터 훈련시켜 산으로 가려하는, 그 것도 보통 산이 아니라 5,000미터가 넘는 고산을 올라보겠 다는 내가, 그 의사의 눈에 온전해 뵐리가 없었기도 했겠다. 장애선교단체에서도 참고가 될 만한 탐탁한 자료는 제공받지 못했다.
‘자폐장애자들의 고산등반 가능성’ 아무리 둘러봐도 조언을 구할 곳이 없다. 결국 내 방식(?), 지난 5년동안 그들과 산행을 계속하면서 내게 주어졌던 느낌대로, 그간에 경험에서 믿어지는 바 대로 일단 산에 들어가서 맞 부딪쳐 해결을 보기로 방향을 잡는 수 밖에 없었다.
방법도 엉성하고 훈련량도 모자라기는 하지만 무어라 꼬집어 낼 수는 없는데 그들 나름으로 조금씩 깨치고 달라지는게 느낌에 잢혔다. 억지가 사촌보다 낳다는 터무니 없는 안도감이 생겼다. 처음에는 12시에 점심 안먹으면 죽는 줄 알던 강준구 대원의 12시땡 점심시간이 형편에 따라 1시고 되고 2시고 되고 융통성이 생겼다. 누가 뭐라고 건네도 씨익 웃기만 하지 입을 떼지 않던 벤자민 정 대원은 ‘Are you OK?” 컨디션 체크 싸인에 “OK!” 답하기 시작했다. 대니엘 리 대원은 가다가 정지 해서 워킹스틱을 양손에 쌍칼로 나눠 들고 칼싸움하는 회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드디어 없어졌다. 모두들 가자! 하면 출발이 됐고 쉬자! 하면 쉬어졌다. 앞서서 혼자 내빼는 준구에게 Slow-down! 싸인이 먹히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가자! 가 보자!
일이 되려는지 정재학 산우의 주선으로 서울의 등반장비업체 NEPA에서 성능 좋은 Gore tax sleeping bag, Back pack, 중 등산화, 기능성 등산복 등 많은 후원장비들이 도착했다. 전문 등산 장비는 비싸다. 현지 산악계의 덤덤한 반응에 갈아 앉았던 사기에 큰 용기를 얻었다.
山은 천년을 버텨서서 사람들로 험하고 먼길을 돌아 그여히 찿아들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번 또 오를 산을 찿고 때를 만든다.
그예 山으로 떠나는 날이 됐고 밤 10시 LAX공항에 나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어디로 떠나본 적이 없어서 어리벙벙했다. TACA Airline 탑승구에 차선배가 나타났다. 20년 넘게 함께 등산을 다녔던 노련한 산꾼이다. 산 사진은 피사체가 있는 곳까지 제발로 올라가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는 것이라 등반기록을 위해 같이 가자고 졸라대도 답이 없더니 비행기 떠나는 시간에 맞추어 짜~안 나타났다. 그러고 나타나면 좀 났냐? 야속하기도 하지만 시작부터 든든하고 마음 놓인다.
매번 해외산행때 마다 비행기 타는 일은 참 복잡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모두가 고분고분 잘 따라주어 안심이고 케빈 대원의 수고로 예상보다 어렵지않게 출국수속을 마쳤다. 커다란 카고빽 9개 다 부치고 Boarding Pass받고 신발까지 벗어 보여 주고야 통과, 비행기에 올랐다. 모두들 제자리에 으젖하게 앉아서 긴장된 표정 하고 차려입은 등산복 하며 누가 봐도 그럴듯한 등반대 같다.
어제밤 10시에 나와서 오늘 새벽 1시에 떳다. 4시간 날아서 El Salvador의 수도 San Salvador에 도착, 공항 청사 바닥에 앉아 한시간쯤이나 기다리다 다른 비행기로 갈아 타고 또 4시간, 비행시간만 합이 8시간을 날아 온몸이 뒤틀릴 때쯤 Peru의 수도 Lima공항에 내렸다.
이 동네 참 재미있다. 세관을 빠져나가는데 길게 한줄로 세워 차례차례 앞 기둥에 달려있는 빨간 단추를 누르게 한다. 파란불이 켜지면 조사 생략 그냥 나가고, 빨간불이 켜지면 짐검사를 한다. 복불복이다. 우리 일행중에 케빈대원이 그만 빨간불을 켰다. 커다란 카고빽을 까뒤집는데 참 차근차근 깐깐하기도 하다. 팀 전체가 남들 다 나간 뒤 맨 꼬래비로 공항문을 나섰다.
차선배는 시내 나가 놀다 밤 뻐스 타고 막바로 후아레스(Huaraz)로 들어가겠노라고 혼자 사라지고, 장애우대원 3명, 자원봉사대원3명, 나중에 계획에 없던 단장으로 참여한 Joy Center의 김전도사, 나, 총원 8명, 카고빽 9개, 잽싸게 확인하고 미리 예약해 두었던 밴트럭 타고 호텔로 간다. “리마 가면 좀 비싸게 먹히더라도 신시가지 호텔에 들어, 구시가는 좀 위험해, 지저분하고.” 떠나기전 어떤이가 권했었다. 신시가지는 번화가이다. 큰 현대식 빌딩에 근사한 Restaurant도 많고 화려한 Shopping Mall, 은행, 관공서 등이 몰려 있어서 Lima의 중심가이자 Peru의 중심가이다. 우리기 사는 L.A.와는 좀 다른 관경이 저들의 눈에 되도록 많이 담기기 바라고 또 호텔비도 아낄겸 우리는 구시가지로 갔다. 대체적으로 좀 우중충해 보이지만 5,000년전 고대 잉카와 에스파냐풍 고색 창연 한 빌딩들이 밤이 되면 색색의 조명을 받아 아름답다.
Hotel España, 싼 대신 복작대고 지저분하다. 세계 각나라 배낭족들이 몰려들어 만들어 내는 각색의 분위기가 흥미롭다. ‘San Francisco사원’이 건너다 뵈는 옥상에 Peru를 찿아온 젊은 여행객들이 뫃여 오랫만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 듯이 어두워지기도 전에 함께 어우러져 마시고 떠들고 깔깔댄다. 각자 정해준 방에 짐을 풀고 샌프란시스코 사원을 방문했다. 다음 문 여는 시간까지 한참을 기다려 머리당 2불씩 표 끊고 가이드를 따라 사원 투어에 나섰다. 두 성악가가 성가풍의 노래를 부르고있는 메인홀을 지나 길게 늘어서서 좁은 통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 묘지다. 초입에는 옛날 사원 에 지위가 높았던 사제가 유리관 속에 누워 전시되고 있는 곳을 지나 셀 수 없이 많은 시신의 뼈들이 해골은 해골대로, 상박, 하박, 골반, 어깨 정강이, 발목… 부분별로 가지런히 정렬돼 있어서 다 맞추면 족히 수천의 시신은 될 것같다. 미로같은 좁은 통로를 구불구불 따라가면 드문드문 작은 기도실이 있다. 벽에는 얼마나 오랜세월을 그 벽에 걸려있었는지 금방이라도 사그러질 것 같은 작고 검은 십자가가 어두운 조명을 받으며 달려있고, 제아무리 ‘나는 죄 없다’ 자신할 사람이라도 그 방에서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투어를 끝내고 밖으로 나와서 까지 무겁디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아이 들의 표정도 엄숙하고 심각하다.
다음 날 아침,
“6시 25분입니다. 이 딱고 세수합니다” 강준구의 기상 나팔은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등반 기점 도시 후아래즈로 가는 Bus시간은 8시30분인데 호텔식당의 아침식사 서비스는 8시나 돼야 시작 된다고 한다. 모두 굶길 수는 없어 호텔 인근의 식당에 웃돈을 더 주고 7시에 이른 아침을 해결했다. 땅 덩어리가 커서인지 장거리를 뛰는 2층 Bus는 안락하고 근사했다. 차 안에서 비행기 처럼 Lunch도 준다. Bus 시스템도 꼭 비행기 타는 것과 비슷하다. 짐 부치고 여권 보여주고, 테러 예방을 위해서라나 머리 꼿꼿이 들고 사진까지 찍히고서야 출발했다.
덩치 커다란 Bus가 둥실둥실 도시 중심가를 벗어나 부산하게 열리는 아침 거리를 빠져 나간다. 시간에 쫒겼는지 채 마르지 않은 머리로 콩나물 버스에 오른는 여인도 보이고, 높은 육교, 나 어린 시절 동대문 밖 청량리 풍경 같아 정겹다. 차선도 분명치 않고 신호등도 없다. 더러 있는 신호등도 불이 들어오지 않아 먹통이란다. 교통순경 아저씨는 그냥 멀건히 서있고 운전수들은 뭘 어쩌라고 차창으로 목을 길게 빼고 빽빽 악을 써댄다. 빈민가 사이를 반짝반짝 광나는 자가용 타고 지나가는 기분이 이럴까. 벤자민은 계속 싱글대고 강준구는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대고 대니엘은 목에 걸어준 이름표 줄을 배배 꼬고 앉았다.
북미 카나다에서 남미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기네스 레코드에 세계에서 제일 긴 Pan Americal Highway를 4시간여 죽자고 달리더니 이번엔 불끈, 해발 4,100 미터나 솟아 오른 고개 Conococha Pass를 느릿느릿 구불구불 힘지게 넘는다. 멀리 Mt. Huasacran (6,768 M, 코디엘라 블랑카 산맥의 최고봉) 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8시간 걸린다더니 정말 딱 떨어지게 8시간 만에, 막 해가 떨어져 어둑해진 후아래즈에 도착했다. 이 나라 Peru가 아끼는 Huascaran National Park (UNESCO Mountain Heritage 지정) 이 들어 서있는 Cordillera Blanca 산군에는 해발 5,000 미터가 넘는 산이 60여개나 있어서 많은 등반팀들과 트랙킹팀의 산행이 시작되는 도시가 Huaraz이다. 5-9월까지 건기 씨즌에는 세계 각 나라에서 찿아온 사람들로 북적댄다. 1970년 강도 7.8의 지진이 일어나 도시 전체와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매몰되고 실종됐다. 그 폐허 위에 아직도 복구중인 도시라서 전체적으로 도시 미관이 어정쩡하다. 뻐스 안내의 지진 이야기에 모두들 놀라워하는 눈치다. 나는 Los Angeles에서 왔다. ‘강도 7.8의 지진 이야기가 별로 놀랍지 않다’ 옆자리 사람에게 입방정을 떨었더니 ‘너 잘났다. 별개 다 자랑이다’ 표정이 뜨악하다.
세번째 날,
아침에 일어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벤자민도 대니엘도 저희들끼리 짯는지 한번 입었던 T- Shirt는 다시 입으려 하지 않는다. 케빈대원이 꾀를 내어 입었던 옷을 반듯하게 접어서 새 것 처럼 해 주었지만 택도 없다. 벤자민이 입기 전에 반드시 냄새를 맡아보는 바람에 바로 들켜 버렸다. 이른 아침에 어디 가서 티셔츠를 사올 수도 없고, 궁리 끝에 티셔츠를 생략하고 맨살에 폴로 자켓만 입혔더니 빙고! 두 녀석 다 까탈없이 넘어갔다.
후아래즈 도시 자체가 3,300미터 ~ 3,500미터 위에 있어서 좀 걱정이 되었는데 간밤에는 긴 여행 끝이라 피곤했었는지 골 아프다거나 호흡이 답답했다는 대원은 없었다. 그러나 내일은 얘기가 다르다. Base camp자체가 높아서 4,000 미터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도 첯날 단박에. 오늘 최소한 4,000 미터 가까이 고도를 미리 경험시켜 두고 싶었다. 어제 Guide Co.에 고도 3,000 ~4,000미터의 하이킹 다녀 올 만한 곳을 물었더니, 어프로치가 길어서 자동차로 가도 하루 종일 걸리니 도시 주변 ‘와사크란 국랍공원 ‘내에 2,500 ~ 4,000미터의 관광지를 자동차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고소적응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바가지 낌새가 좀 보여 찝찝하기는 했지만 도리 없이 $350. 계약외 웃돈 을 주고 그러자 할 수밖에 없었다.
첫날 뻐스 운행시간을 칼 같이 지키는 걸로 보아 정확하리라 믿었던 Peruvian Time도 만만치는 않았다. 8시 반에 오겠다던 가이드 크루가 9시 반이나 돼서야 나타나 ‘Good Morning’만 외친다. 아예,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기색 같은 건 없다.
포장도 되어있지 않은, 말만 차길이지 길 같지도 않은 산간 도로를 타고 국립공원 내 최고 높다는 지점으로 올라갔더니 고도계에 4,000미터가 찍혔다.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산 높이 다운 매운 바람에 코가 찌~잉 하다. 내일 위로 올라가면 이렇게 춥다를 보여 주려 모두를 찬바람에 마주 세웠는데, 남에 속 모르는 우리 단장님, 녀석들이 안타까웠는지 잽싸게 목도리를 둘러주어 졸지에 등반대를 관광단으로 본색을 드러내 놓았다.
점심이래야 뻣뻣하게 마른 빵에다 냄새나는 치즈 두 쪽, 비스켓 한 봉지, 주먹만한 오렌지 1개가 다인데 잘 들 먹어 치운다. 온 종일을 고지대 비포장 도로를 오르락내리락 했더니 허리가 부러진다. L.A가서 맥주 사주겠다 했더니 대니엘은 입을 있는대로 벌려 크게 웃으며 “No Man!”, 강준구는 “맥주는 안 마십니다”. 차를 탄 건지 말을 탄 건지 자동차 천정을 하도 많이 박아서 머리가 띵하고 온 몸이 쑤신다. 완잔히 절인 배추 돼서 내려왔다.
후아래즈 시내에 내려와 중국음식점 비슷한 Restaurant를 하나 찿았다. 이틀치 식비를 털어, 음식 이름이 ‘체비체’라던가, 높은 산에서 잡은 Trout을 레몬에 숙성시킨듯 생선과 야채를 버무린 접시를 모두들 게걸스레 몇개나 먹어 치웠는지. 달콤 새콤한 쥬스(?)를 많이 마셨더니 모양은 쥬스인데 와우! 안그래도 피곤한데 보기와는 다르다. 사르르 눈 감기고 온 세상이 다 고와 졌다.
호텔로 돌아와 짐 내리고 배정된 방 돌아보는 사이 놀랄 일이 터졌다. 곰 만한 벤자민이 호텔 카운터 옆 화장실에 들어 앉았는데 이노옴! 화장실 문을 열어 놓은채 큰 볼일을 보고 앉았다. 지독한 향기가 호텔 로비를 뒤덮었다. 카운터에 여직원들이 코를 쥐고 어쩔줄을 몰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꺅꺅 소리 지르고 … 그들에게 이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이해시키기 위해 어쩔 수없이 그가 자폐장애자임을 밝힐 수 밖에 없었다. 그 화장실엔 바로 자물쇠가 걸렸다.
네번째 날,
자동차로 시간 반 남짖, 케츄아 사람들의 마을 Collon Village로 올라갔다. 우리의 목표 마운틴 이싱카로 오르는 산행 들머리다. 북서편 능선을 넘어오는 산 바람이 가슴을 通하여 씨원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 포터, 동네 아줌마 아저씨, 아이들, 강아지들, 망아지까지 넓은 공터가 시골 장날 같다. 장비 체크하고 팀 짜고 담당가이드 배정하고 짐 꾸려 당나귀등에 싣고… 무지무지 바쁘다. Donkey Driver (자기들 끼리는 그렇게 불렀다) 당나귀 마부 케츄아 여인, 남편은 어디다 두고 큰 딸아이, 조금 작은 둘째 딸, 조금 더 작은 세째 아들 그리고 갖난쟁이 (아들인지 딸인지)는 등에 업고, 전 재산인 당나귀 두마리로 일년에 몇번 등반대 짐 나르는 일로 먹고 산단다. 집에 보살펴 줄 사람이 없어서 아이들을 당나귀 뒤에 쫄로리 줄세워 같이 데리고 다니노라고. 8~9살쯤이나 됐을까 큰딸 아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꿈은 이산을 내려가 후아래스로 가서 사는 것이란다. 자기 말 스페니쉬에 나를 배려함인지 영어 몇 토막을 섞어서. 굳이 하는 말을 다 알아 듣지 못해도 아이의 간절한 눈밫과 표정에 하려는 말이 전해져 오고 남았다.
우리가 찿아다니는 산과 아이의 산이 참 다르기도 하구나! 기왕에 꾸는 꿈인데 좀 멀리나 꾸지, 고작 이 산에서 30마일을 벗어나지 못하는 구나 싶어 눈 꼬리에 물기가 생겼다.
그래! 어찌든둥 벗어나거라!. 나래도 내려가서 빌어 주마, 열심히 아주 열심히.
원정대원, 가이드들, 아이들까지 모두 23명에 당나귀 세마리. 대 부대다. 서두르자 갈길이 멀다. 지난 밤 Guide Co.와의 미팅에서 등반일정이 일부 수정되었다. 몇일 동안 우리 등반대의 동향을 눈여겨 본 John (Guide Co. 사장)이 “당신의 팀은 이싱카 베이스 트랙킨 정도가 적당하다. 몇가지 상황을 보충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안해서 올라갈 수가 없다”했다. 이사람 영어는 희한하게 나는 알아들을만 한데 내 말은 알아 먹었다는 건지 못 알아 먹겠다는 건지 도통 불분명해서 매번 그의 말 대로 결정이 지워지게 된다. Head Guide 또한 다르지 않았다. 영어가 되냐고 물으니 “Little but I can understand all”이란다. 된다는 건지 안 된다는 건지 아리송하다. 등반하는 동안 내내 둘간의 말 맞춤이 에러를 냈다. 사노라면 어디 말 안통하는 사람이 이들 뿐이겠나만 ‘소통부재’ 엄청 답답하다. 잠시 옥신각신했지만 워낙 그의 주장이 맞는 소리라 아얐! 소리 못 해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장애자대원은 물론 자원봉사 대원에게까지 1:1 Supporter를 붙이고, 저 위 어느 한 지점에 Advance Camp하나를 더 설치하기로 하고, 당초 계약금액에 10%를 현장에서 Cash로 세어 주었다. 이 나라 는 자기네 돈 Sole과 $를 아주 편하게 섞어 쓴다. $1.00 = 2.9 Sol인데 구멍가게에서도 Taxi를 타도 계산기도 없이 재빠르게 소수점 까지 정확하게 환산해 받는다. 그런데, 거스름 돈을 내줄 때는 버벅댄다. 일종에 상술인지, 매번 적지않은 거스름을 그들의 부수입으로 상납했다. 게다가 적은 것이 라도 흠이 있는 지폐는 받지 않아서 $200 정도 쓰지 못하고 되 가지고 왔다.
Ishinca Valley Base Camp는 해발 4,300 미터 위에 있다. 같은 산군에 있는 우르스, 토클라주, 라나팔카 산을 오르는 기점이기도 하다. 어프로치가 시작되는 들머리 콜론 빌리지에서 8마일 거리, 보통은 5시간 정도면 올라간다지만 우리 억지(?)등반대는 7시간 예상하고 10시에 출발했으니 늦어도 해 떨어지기 전에는 Base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Yanaraju Valley를 따라 오르는 산길은 딱 만만히 보기 십상이게 넑고 깨끗하고 경사가 순하다. 오르는 Trail 옆으로 산위 만년빙하가 녹아 내리는 계곡물이 폭포처럼 깊고 굵은 소리로 쿠~우 콰~아 흘러 내린다. 여인들은 약았다. 말도 안 통하는 마부 아저씨 Jack을 어찌 굽고 삶았는지 대장 몰래 Backpack을 당나귀에 실어놓고 할랑 할랑 빈몸으로 따라간다.
두번째 브랙타임을 마친 후 한마일쯤 전진했을까, 또 터졌다. 이번엔 대니엘 대원이다. 점심 먹고나서 부터 뒤처지기 시작했다. 수시로 멈춰서 먼산보기를 해서 내심 불안불안 했는데 그예, 딱 버티고 서서 Everybody Go-Back!을 외친다. 황당하게도 그냥 고백이 아니라 Everybody GoBack이랜다. 예의 그 제 안의 전쟁이 또 시작 됐나보다. 이기고 있는 상황이면 좋겠는데 전세가 영 불리한가보다. 후퇴를 결정해야겠는데 저 혼자 도망갈 수는 없고, 그래서 전원 퇴각인가 보다. 금쪽시간 40분을 잘라먹고도 놈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늠실하고 “어떻게 돼가냐? 물었더니 “No good, We got to go back quickly”랜다. 전방에 작은 Hill을 넘어간 김단장을 워키토키로 불러내려 대니엘과 그의 Guide Supoter와 셋을 묶어 하산 조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멍 나간 정신을 추스리고 돌아보니 후미에서 열심히 걷고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괜칞냐, 기온 내려가니 체온 떨어트리지 마라” 했더니 대답 대신 옆으로 다가와 혼자 우물대던 쵸코렛 바를 하나 건네준다. 제법이다. 십수년 모시고(?) 다녔더니 사부 까먹겠다.
때린데 또 때린다더니 갈길이 아직 먼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산속의 해는 빨리 떨어지는데 하늘 가득 메운 진눈깨비에 시야가 짧아졌다. 온도계의 빨간 금이 눈에 띄게 내려간다. 비상! 체온 덜어트리면 죽는다! 내심 불안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사위는 조용하고 진눈깨비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모두의 호흡소리가 거칠다.
해는 벌써 떨어졌고 예정보다 2시간이나 지나서야 먼저 올라온 포터들이 설치해 놓은 식당 텐트에 하나씩 거의 기진해서 들어선다. Cook이 더운 물 한잔과 코카 잎 한 옹큼을 건네 준다. 잎을 꼭꼭 씹어서 마셔야 효과가 빠르단다. 코카는 마약류일텐데 이곳에선 피로 회복에 좋다고 차로 끓여 마신다.
하루 산행이 참 힘들었다.
다섯번 째 날,
밤 새 진눈깨비는 그쳤고 날씨는 맑아졌는데 텐트 위에 얇게 얼음이 얼었다. 코 앞에 눈 쌓인 산 머리가 구름에 묻혀있다. Cole을 넘어오는 날 선 바람에 넓은 베이스 캠프가 휑하니 춥다.
산의 다양성 때문에 산 오르는 일은 매우 포괄적이다. 산, 사람, 날씨, 컨디션… 여러 조건들에 따라 세밀하게 계획되고 실행하고 정리까지 마쳐져야 비로서 하나의 등반이 이루어 진다. 우리의 등반은 당초 제목부터 ‘자폐장애자 등반대’ 였으므로 특별한 제약을 안고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정상 공략은 누가 됐던 필히 지폐장애자 대원에 의하여 이루어져야만 했다.
훈련을 시작할 때 각자에게 워킹스틱 세트를 지급했더니 서로 마주서서 휘두르며 칼싸움을 벌렸었다. 이싱카 정상부에 얼어있는 경사를 통과하기 위해 Ice Axe Technic이 필수적인데, 스틱으로 칼싸움 을 벌리는 판에다 훨씬 더 날카롭고 무기스러운 Axe를 쥐어줄 수가 없었다. 혹여 누구 하나 찍히면 치명적 상황이 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상 욕심은 기획 당시부터 없었고, 대신 정상 직하 Ice Climbing이 시작되는 설원 끝 지점을 우리의 등반 목표점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Benjamin대원과 자원봉사 대원 경숙, 그외 Cook, 만약을 위한 예비 Suporter 2명이 대장과 함께 Base 요원으로 남고, Head Leader Ronaldo, 강준구 대원과 그의 Supporter, 준구가 이상증세를 보일 경우에 대비하여 케빈 대원과 앨렌 대원 그리고 그 둘을 위한 Supporter, 사진 기록을 위해 차선배, 그렇게 8명을 정상공략팀으로 나누었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겐 정상에 서고 싶은 욕망이 당연한 것이므로 따로 Summit을 언급하지 않았다. (‘정상 직하 한 지점까지 도달하면 이번 등반은 성공한 것으로 보리라’는 내심 결정도 혼자 삼키고 그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10시에 정상공략 팀이 Advence Camp설치를 위해 출발했다. 장비와 식량 수송 을 위해 당나귀 2마리 (원래는 1 마리 인데 새끼 당나귀가 제 어미를 쫄레쫄레 따라가는 바람에 둘이 됐다) 가 따라붙어 전진캠프 팀이 별나게 커졌다.
오후 1시 정각에 약속한 대로 워키토키를 열었다. 걱정했던 대로 식구가 많아서 적당한 캠프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장소를 찾는 대로 캠프를 설치하고 휴식에 들어 갈 것이다. 오버 & 아웃” 현재 시간 일기는 바람 없고 맑음. 이대로 내일까지 쭈-욱 바람 자고 맑음으로 가주었으면 좋겠다. 지난 밤도 잡다한 궁리와 걱정들로 잠을 자지 못하고 비몽사몽 했다.
뚱보 벤자민은 식당텐트 앞에 면산(面山)하고 산을 호령이라도 하는 건지, 저도 산 돼보겠다는 건지 고대로 버티고 선채로 두어 시간 째다. 말려도 말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Sun Cream을 덕지덕지 발라주고 작은 의자를 옆에 놓아주었다. 점심 먹는 시간 빼곤 해 지기 직전 까지 고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세웠는지는 알길이 없다.
2번째 교신시간, 워키토키를 열었다. 쉬쉭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지 응답이 없다. 5분 간격으로 계속 불러댔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다. 분명 교신거리가 20마일은 나가는 신형이라고 했는데, 겹겹이 가로막힌 산을 넘지 못하는가, 아니면 어떤 멍청이가 주파수를 건드렸나, 밤새 껏다 켰다 했지만 끝내 ‘여기는 전진캠프 베이스 나와라!’ 콜이 잡히지 않았다. 정상공략 팀과 완전 연락 두절이다. 궁금하고 답답하고 걱정되고 미치겠다!.
여섯번째 날,
밥새 뒤척이다 얼핏 잠이 들었나 보다. 제풀에 놀라 깨보니 새벽 5시다. 배낭을 꾸렸다. 옆에서 부시럭대던 아내가 “왜, 올라가려고? 잠도 못 잤잖아, 뭘 그리 걱정을 해, 당신 답지 않게, 잘 하고 있는데” 단숨에 늘어 놓지만 귀에 걸리지 않는다. 지금은 남편이 아니라 등반대의 장이다. 책임이란 거 그거 엄청 무거운 거다. Cook이 재빨리 물을 끓여 누런 설탕 듬뿍 넣고 코카 잎도 부셔 넣어 물병에 담아 준다. 되는 대로 Power Bar 한웅큼 Daypack 주머니에 챙겨 넣고 넓은 Site를 가로 질러 어드밴스 캠프로 정상 팀을 찿아 올라갔다.
숨은 차는데 마음이 급해 쉴 수가 없다. 피 마려운 것도 참고 2시간여 올랐을까 산 모퉁이 하나를 돌자 전방 아늑한 분지에 눈에 익은 텐트 3동이 반갑게 서있다. 조금 잛게 잘랐구나! 어제 올라와 쉴때야 좋았겠지만 오늘 올라가야할 길이 너무 많이 남았다. 5,000미터 대 모레인지역을 넘어 가능 하면 정상쪽으로 많이 전진하여 어드밴스를 치라고 말을 맞추었었는데, 그놈에 ‘Little but understand all’ 영어가 실력 발휘를 했나보다. 새벽 1시 30분에 정상으로 떠났단다. 11시 30분 경 돌아 오겠다며. 10시간이면 충분하긴 한데 Guide와 차선배 빼고는 5,000 미터 고도를 올라 본 경험이 없는데 그 위에서 10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런지 걱정된다.
Advance에 남아있던 Ellen 대원을 나서라, 올라가자! 했더니 “어제 올라오느라 죽을뻔 했는데…” 밍기적 댄다. 어제 혼났으니 오늘은 괜찮을거다 달래서 함께 나섰다. 한시간쯤 올라가 마지막 모레인 지대가 나타났다. 앙증맞은 삼거리가 있고 갈림 길가에 케룬이 쌓여있다. 왼쪽은 이싱카의 북서쪽 능선을 타는 길이고 오른쪽이 남서쪽 능선으로 가는 우리 팀이 갔을 길이다, 멀라 가물가물 건너다 뵈는 Slope 를 까만 점 4개가 글리세이딩(엉덩이 썰매)으로 내려온다. 우리 팀과는 머리수가 맞지 않는다. 그래도 궁금해서 NW Ridge빙하가 끊어지는 지점을 겨냥하고 넘어 갔더니 정상쪽에서 흘러내린 빙하가 작은 Basin에 고여 호수를 이루어 놓았다.
암갈색 물빛이 하도 고와 넋놓고 보다가 Ellen대원을 불렀다. (그게 화근이 될줄은 몰랐다)
왜 아직 안내려 오지? 예정대로라면 이 지점을 통과하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다. 사고인가? 얼른 고개를 흔들어 방정을 지운다. 머리를 흔든 덕에 현기증이 아찔하다. 프랑스 여인 하나가 가이드를 앞세우고 내려온다. 혹 위에서 Korean Team을 보았느냐? 물었더니 아침에 Japanies Team은 보았단다. 이 Ropute로 들어온 일본 팀은 없는데, 얘들은 동양인은 다 Japanese로 뵈나 보다. 100여 미터를 더 전진한 지점에 흐미하게 Shot Cut 흔적이 보인다. 길의 방향과 각도로 보아 우리가 기다리던 지점보다 훨씬 더 아래로 떨어진다. 현지 가이드들은 대체적으로 Shot Cut을 잘 한다. 아하! 요길을 잘라서 저앞으로 질러갔구나! 혼자 지레 생각하고 상황을 정리했다. 내려가자! 만에 하나 사고라고 해도 어차피 여기서는 할 일이 없다.
옆에 Ellen 대원의 표정이 거의 사색이다. 위로 올라간 Kevin 대원이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랑이다. “다른 길로 내려갔겠지요. 그쵸?”
낸들 알 수 있나, 물 한컴 마시고 사탕 2개를 한꺼번에 까서 입에 넣고, 만약의 경우 해야 할 일을 #1, #2, #3… 발길을 재촉했다.
아니, 아니지! 요 좁은 지형에서 지들이 뛰면 어디로 뛰어? 날씨? 맑고, 바람? 없고, 벌건 대낮에, Guide를 겹겹이 엮었는데. 지형으로 보아도 그렇고 모든 여건을 몽땅 동원해서 그림을 그려 봐도 전혀 사고 날 상황이 그려지지 않는다. 아니다! 확신이 들면서도 편하게 살아서 심장이 쫄았는지 계속 두근 댄다.
멀리 어드밴스가 내려다 보이는 지점까지 왔을때 갑자기 Ellen대원의 목청이 튀었다.
“어드밴스에 사람들이 많은데요! 다른 길로 내려왔나 봐요!”
Kevin 대원이 마중 올라와 툴툴댄다. “You are killing me!” 꺼꾸로 내려오지 않는 우리를 걱정했나 보다. Shotcut했냐? 물었더니 아니란다. 그러면 한가지 짚히는 데가 있다. 내 실수다!
암갈색 물빛이 하도 고와서 Ellen 까지 불러 Basin쪽으로 그들이 통과하는 Route를 약 10여분 동안 벗어나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그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다.) 밤새워 나를 걱정시킨 고놈에 워키토키 는 운행중에 분실했단다. 설원에서 떨어 트리면 햊빛 반사가 강하기도 하려니와 눈에 묻혀 찿기가 어럽다.
그렇게 2시간짜리 지옥 구경이 허무하고(?) 다행스럽게 끝났다.
가이드 크루는 열심히 캠프 철수를 서두르고, Site 한쪽 구섞에 널부러져 있던 차선배가 소리낼 기운 도 안 남았는지 손가락으로 나를 부른다. “대장을 까딱까닥 손가락으로 부르냐?” 다가갔더니 여전히 눈은 감은채 카메라를 내민다.
!!강준구다!!
뒤로 이싱카와 라나팔카 봉을 등지고 설원 끝 부분에 강준구대원이 당당하고 멀쩡하다. Head Leader에 Supporter 까지 같이 붙어있는 그림에서 적잖이 어려웠던 상황이 읽혔다.
베이스 캠프를 철수하는 날, 강준구의 기도는 간결했다.
하나님! / 감사합니다 / 높은 산에 올라갔읍니다 / 힘들어 죽을 뻔 했읍니다 / 산이 좋읍니다 / 우리를 위하여 / 대니엘을 위하여 (먼저 내려간 대니엘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 아멘.
Mt. Ishinca를 뒤에두고 모두 둥둥 떠서 내려왔다. 길 바닥에 소똥향(?)도 구수하고 세상이 다 이쁘다.
끝냈다!
그렇게 갔던 길을 되 밟아 또 하나 山을 내려왔다!
어차피 산은 오르는 자 저마다 제 몫으로 마음 저 밑에 내려앉아 꽤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천천히 천천히 추억으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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