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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Archives: 기고문

무제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채희탁 교우

촬스 다윈의 진화론은 약육강식, 자연도태, 적자생존의 이론으로 이를 거처 오늘날의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이론입니다. 15세기 당시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신의 창조론이 대세였는데 독실하고 권위 있는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난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자 그 충격이 대단하였습니다.

갈릴레오의 지동설, 뉴톤의 만류 인력은 진화론 충격을 확산, 가중시켰으며,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시야를 태양계를 너머 먼 우주로 확산 시켰습니다. 미신과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의 무지와 기득권 유지를 위한 노력은 위협을 받았으며 마녀사냥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어 문예혁명과 르네상스로 이어지고 뒤따른 산업혁명은 대세를 바꾸어 기계문명의 시작인 증기기관차가 철로를 따라 괭음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E=MC2)은 핵분열이 일으키는 엄청난 파괴력에 전 인류가 경악했습니다. 핵 패기물과 그 처리가 어렵고 환경을 오랫동안 파괴하고 오염시킵니다.

한편으로는 아인슈타인의 빛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이론은 인간의 시야를 태양계를 훌쩍 뛰어 넘어 은하계 우주를 아우르는 병행우주론과 빅뱅이론을 밝히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핵 융을 이용한 수소 폭탄도 그 파괴력이 엄청 나지만 핵융합을 잘 관리하면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를 다량 얻을 수 있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핵융합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로 남아있다. 또한 양지역학은 우주에 거시적 접근에 더하여 원자, 분자, 단위의 미립자 세계에 대한 접근은 인간신체 내 분자 세포의 세계를 밝혀 신경세포 뉴론의 작동원리와 인간의 DNA를 밝히기에 이르렀습니다.

두뇌의 작동원리는 인간의 인식능력, 감성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 줌으로서 좌절과 고통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인간은 명실 공히 만물의 영장의 지위에 올라섰습니다. 신은 더 이상 인간을 지배하는 절대자가 아닙니다. 단테의 신곡에 나타난 연옥, 지옥은 더 이상 인간을 옥죄지 못합니다.

앞으로 전기의 시대에서 자기력의 시대로 대세가 넘어가면 상온에서도 작동하는 고온 초 전도체가 활용되고 상용화 되면 땅 위에 뜬 채 연로도 없이 수백 KM를 달리는 자동차를 볼 수 있으며 멀지 않은 훗날에 상용화 될 것입니다. 여기서 물질, 반물질의 짝인 전자와 양전자는 전하의 부호가 반대다 예를 들어 전자는 음전하를 갖고 있는 반면 전자의 반물질인 양전자는 양전하를 띠고 있습니다. 반물질의 가장 큰 특징은 물질과 접촉하자 마자 사라지면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티스푼 정도의 분량이 물질과 만나 사라지면서 방출하는 에너지는 뉴욕시를 날려 버리고도 남는데, 이는 E=MC2의 100% 효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개발은 지금은 초기단계이지만 그 영역을 계속 확장하고 있으며 그 발전이 크게 이루어 졌을 때 도덕적 윤리적 문제와 정치 경제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갑론을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Homo Sapience가 인간의 조상으로 출연한 이래 가장 극심하고 빠른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현명하게 상황판단을 하여 우리의 행동을 결정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판단에 근거한 행동은 지옥의 나락으로 인간을 떨어뜨릴 것입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를 대신해 결정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콘 머핀을 좋아 하세요?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이혜정 권사

TV에선 요즘 영화와 같은 실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에서 며칠 전 있었던 일로 경찰이 도망가는 비무장 흑인 남성을 총 쏘아 죽게 한 사건 때문이다. 그곳은 노스 찰스턴이라는 곳 인데 찰스턴항은 300년이나 계속됐던 노예무역의 주요 항구였던 곳으로 미국 역사의 비극적 어둠의 그림자를 간직한 도시다.

이 사건으로 사망한 흑인 남성을 보며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또 그 모습들과 함께 생각나는 음식이 콘 머핀이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콘 머핀과 함께 딸려 오는 미스 스미스와 미시즈 버틀러와의 따뜻한 추억 때문에 그 음식은 항상 그리움이 앞선다.

80년대 초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일한 곳이 뉴욕 엘머스트 시립병원 정신과 병동이었다. 경험도 없는 간호사로 밤 근무를 피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몇 개월을 지나기도 전에 난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나의 가장 약한 기관인 소화기가 탈이 나며 잠도 잘 못 자고 몸은 더 마르며 살이 점점 빠지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과 병동의 특성상 컨퍼런스나 미팅 또 카운슬링 등 모두 말로 해야 하는 것들 이었다. 난 이민 온지 몇 달 밖에 안 된 상태로 그곳에서 문화적 충격과 함께 영어 소통의 어려움으로 일 하는 것에 거의 공포를 느꼈다.

난 아무래도 이 상황을 이겨내고 계속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 병동의 수 간호사인 미스 스미스에게 그런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 곳은 당시 수간호사를 비롯해 거의 모든 스텝이 흑인들이었다. 계속 일하고 싶지만 너무 힘들고 몸까지 아프기 시작하니 그만 두어야겠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듣던 미스 스미스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이 떠오른다. 어린 딸 하나를 키우던 싱글 맘으로 짧은 곱슬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며 흑인 특유의 여유와 우아미가 넘치는 멋진 여자였다. 그녀는 내 얘기를 듣고는 날 꼭 안아줬다. 당시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30년도 더 지났지만 지금도 그 따스함과 진실함이 느껴진다. 지금이나 그때나 미국의 안고 안기는 문화에 적응치 못하는 나인데도 사람이 사람을 꼭 안아줌의 힘을 알게 된 기회였다. 그녀는 내가 매일 웃고 다녀 그렇게 힘든 줄 몰라서 미안하다며 미국으로 이민 와서 몇 달 만에 이런 정신과 병동에서 그 정도 일하면 아주 잘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만 두기 전에 함께 도와 노력해 보자고 했다.

그 후 나의 엄마뻘 되는 나이의 동료 간호사인 미시즈 버틀러를 나와 짝으로 맺어 주어 모든 것을 같이 도와가며 일을 배워가게 해 주었다. 미시즈 버틀러는 나를 정말 딸인 양 손까지 꼭 잡고 언제 어디든 함께 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콘 머핀의 맛이다. 그 병원 7층에 있었던 조그만 구내 매점에서 사먹던 옥수수 빵인데 이걸 반으로 잘라 토스트오븐에 구워 버터를 듬뿍 발라 먹곤 했는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우리 병동에선 거의 매일 오전 커피브레이크에 단체로 콘 머핀을 사다 먹곤 했다.…

희망을 심어준 사랑의 인술사업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이내운 집사

사랑의 인술사업을 만나게 된 경위

2008년11월 하순경 현재 LA 민주연합 상임대표와 중원포럼 회장을 맏고있는 이병도씨가 가든스 윗호텔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 왔다. 본인이 2009년 제 17대 남가주충청향우회장을 취임하는 데 나보고 사무총장을 맏아 달라는 요청 이었다. 나는 이민초 라크라센타에서 8년 정도 살았었 는데 이 당시 어머님이 미국에오셔서 1년 나와 함께 계시다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라크라센타 지역은 한인인구도 많지 않았고 한인타운처럼 사람들이 자유스럽게 걸어다닐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기에 낮에 아파트에는 어머님이 혼자 계셨었는데 어머님은 농담으로 자신모습을 “창살없는 감옥생활” 이라고 표현을 하셨다. 워낙 소탈하시고 활동적이셨던 이런 어머님을 위해 나는 일간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어머님을 모시고 충청동우회 월례회에 참석을 하였다. 나가서 어르신들께 자식처럼 반주도 권하고 노래방 도우미로 고향 어르신의 기쁨조 노릇을 하였다. 65세이상 노인모임 인 충청동우 회에 아들뻘인 내가 어머님을 모시고 봉사를 하면서 특별회원으로 가 입이 되었고 현재까지 10년째 기쁨조로 노인들을 섬기며 봉사를 하고 있다. 향우회 이사회를 통하여 나를 보았다는 이병도 회장의 면담을 통하여 나는 그가 본이 같은 전주이씨에 고향도 같은 동향인 논산이고 , 충남대학생회장 출신에다 신앙도 같은 카톨릭이며 정치성향도 나와 비슷한 중도진보성향이라 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소한 인생관과 가치관의 성향이 비슷하여 나는사무총장직을 수락하게 되었고 충청향우회의 주요사업 이었던 국제적 사랑의인술사업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 사업은 자민련당 총재를 지내셨던 심대평 충남도지사가 1997년에 LA슈라이너병원과 충청남도 고국 화 상 어린이를 무료로 치료해주겠다는 사랑의인술사업 협약식을 체결하고 미국에서의 그 사업의 관리를 충청향우회가 맏게 됨으로써 본 사업이 시작을 하게 되었다. 2013년도에 본사업이 종료되기 까지의 16년동안 화상어린이 300여명을 무료치료을 해주어 미래가 참담하고 불투명하였던 불쌍한 어린새싹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심어주게된 매우 보람있고 흐믓한 사업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1998년 제6대 김흥영 회장이 첫번째 화상입은 이미애 아동환자의 입원치료가 무사히 성 공함에 따라 본사업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무료치료 자격조건은 18세이하의 극빈층 화상 어린이로써 한국에서 정기검진을 통해 선정이되면 미국 슈라이너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을 수가 있 었다. 매년 정기적으로 평균 30여명의 어린이 환자를 한국에서 발굴해서 미국 슈라이너 병 원에서 모든 입원치료를 전액 무료로 해주었다. 2003년도 제 11대 신구현 회장때에 가장 많은 50 명의 어 린이환자를 입원치료를 해주었고, 이상주 약사님이 향우회장이 이었던 2002년도에 충청북도가 추가협정 체결이 이루어지 면서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충청북도 등 3개시도의 화상어린이가 본사 업의 치료혜택을 보게 되었다. 사랑의인술사업은 화상으로 일그러진 동심과 절망을 가지고 평생 살아가야만 했던 어린이들에게 삶의 새희망을 선사하고 싶어했던 어른들의 마음이 계기가 되었고, 아이들 치료를 맡은 ‘LA 슈라 이너 아동병원’과 충청 지역 ‘지방정부 자치단체’의 후원, 그리고 이들 을 연결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던 ‘남가주 충청향 우회’의 연합과 협력으로 3개기관이 든든한 연결고리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업 이었다. LA 슈라이너 아동병원 은 1952년에 개원을 하였 는데 병원의 전반적인 운영은 오로지 개인또는 단체의 도네이션만 으로 운영되는 병원이었다. 이 병원에서 현재까지 약 4만여 명의 아동환자를 치료해주는 실적을 보이고 있었는데 1998년 사랑의 인술사업을 체결하여 16년동안 한국어린이 환자 300여명이 무료치료를 받아 지금 정상인으로 생 활을 하고 있다.…

장애우 등반을 다녀와서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유한종 집사

발달 장애우 페루비안 안데스 원정등반

자폐장애를 앓고있는 그들을 두고 무슨 봉사라거나 무위(撫慰)라거나 어줍잖은 보시(普施) 같은 걸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다만, “당신같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평생 등산이라는 게 무었인지도 모르고 살다 길 수 밖에 없는 친구들이다!”라던 발달장애자 토요학교 특수활동 담당목사의 권고를 모질게 외면할 수 없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된 일일 뿐이다.

어쨋거나, 발달장애자토요학교에 등산 커리큘럼이 시작됐고 장애자 혼자 등산에 나설 수 없어 1:1의 자원봉사자가 따라 붙어야 하는 등의 이러저러한 어려움들을 겪어 넘기면서 5년여 동안 이산 저산을 오르내렸다. 처음에는 평지와 판이하게 불규칙한 산악지형을 걷는 자체가 생소하여 한 발자욱 내 딛기도 어려워하던 그들이 아주 조금씩 산행에 익숙해지고 난이도를 올려가는 동안 나도 모르는 새 정도 들었고, 아주 느리지만 나름으로 차곡차곡 산과 자연과 어우러져 감을 보는 감동 또한 적지않았다.

‘발달장애자 등반대 고산원정등반’은 그렇게 그들이 소속돼있는 장애선교센터의 기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꿈과 ‘저들로 하여금 높은 산위에 서서 한번쯤 세상을 내려다 보게 해 줄 수잇으면 좋겠다’ 는 내 막연한 욕심이 죽이 맞아 저질러진 일이다.
마침 우리 교회 마당에 인공암벽이 세워지고, 그 시설이 어떤 경로로든 지역사회 관심자들에게 긍정적으로 쓰여질 수 있기를 내심 바라던 터에, 장애자 원정 훈련장으로 안성마춤이었고 실제 그들의 담력을 키워 높은 곳으로 오르는 공포를 삭이는데 결정적 역활을 해 주었다.
‘설마, 우리 아이가?’… 그렇게 막연한 꿈이기만 하던 부모들의 의구심이 아주 천천히 관심과 참여로 부풀어가면서 ‘그래 한번 해보자!’ 내 마음도 덩달아 부풀었다. 일단 불이 붙은 장애학교측의 설득력 과 추진력은 놀라웠다. 아무 것도 갖추지 못한 제로상황에서‘우리도 할 수 있다!’, ‘자폐장애우 페루비 안 안데스 원정등반’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불과 몇달 만에 자폐장애자 대원 3명, 자원봉사 대원 2명이 확보 돠었고, 자원봉사 대원 하나가 모자라서 아내 경숙을 반 강제동원하여 나까지 합하여 총원 7명의 원정대가 일단은 꾸려졌다.
막상 시작은 되었으나 이전에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등반인고로 산악계 일원에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 기는 했는데, 일반사람들은 ‘참 좋은 일이다!’ 부축였지만 정작 절실했던 산악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호응은 고사하고 무모하고 위험한 발상이라며 훈련조차 참여는 커녕 거들어 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외로운 훈련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기실, 그들의 염려 반대가 오하려 맞기는 하다. 등반은 꿈 보다는 실제다. 대원들의 부모는 물론 주최측 선교회의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격려가 정신적으로 용기를 줄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산에서는 단 한 발자욱도 가파른 경사를 대신 올라주지도, 단 한 호 흡 가쁜숨을 쉬어주지도, 단 한방울 땀을 흘려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애당초 홀로 부푼 가슴이기에 쫄지는 않는다. 본디 등반은 외롭다.
일반적인 등반대에서는 철저하게 임무를 분담한다. 등반기술, 수송, 장비, 의료, 식량, 기획, 행정, 회계, 기록… 각자의 실수 하나가 등반 전체를 망치기도 하고 때로는 불행한 사고로 연결될 수도
있기에 누구나 자기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팀웤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것이다.…

한국, 어디로 가고 있나!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신영균 장로

우리 부부는 지난 6월 초 우리의 조국 한국을 다녀왔다.

약 8년여 만에 방문이어서 기대도 많았고 흥분도 되었지만 건강이 여의치 못해 많은 우려를 가지고 갔었다. 입국하는 순간에서부터 엄청난 중국 관광객 때문에 다소 불편은 있었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에 대한 흥분은 가라 안칠 수가 없었다.

도착한 날이 금요일 오후라 교통이 많이 복잡했지만 한강위에 새로 놓여 진 멋드러진 다리며 또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와 처음 본 고층 건물들 그리고 값비싼 외제 차들의 행렬에서 그동안 경제 발전의 높은 눈금을 바라보는 듯 놀라왔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놀라움은 곧 우려와 염려로 바뀌어 갔다.

겉으로만 본 조국과 그 안에서 형성되고 있는 무서운 사회양극화가 회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아니했나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성장의 동력은 잃어버린 것 같았고 저 출산과 초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빈부의 격차와 이념 대립과 지역갈등은 그 골을 이 더 깊게 파고 있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위기관리 능력도 없어보였고 이렇게 분야마다 양극화된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역사의식의 부재로 외세의 경향 및 민족의 평화를 위한 교류 문제는 아예 덮어 두고 종북 좌파만 양산 시켜 사회 올가미만 쓰여 놓고 오만과 독선으로만 가득 찬 그런 함량 미달의 역량을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단이여야 할 권력이나 재력이, 모든 국민이 추구하여야 할 목표가 되면서부터 그 가치와 개념을 변화 시킨 이 나눔과 소통이 부재한 현실을 체감할 때 MERS사태 까지 겹치면서 온 나라는 깊은 수령에 빠져 버린 모습이었다. 게다가 종교마저 그 역할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것 같아 그 안타까움이 더 하였다.

우리 민족 역사에 가장 고통을 많이 준 일본이 재무장을 시작했고 중국이 경제 대국이 되어 민족주의로 점점 우경화 되어 가는데 이 절실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아무런 비전이나 희망도 찾아 볼 수가 없고 그저 패거리 싸움만하는 정치계, 분배와 나눔을 저버리고 이윤만 창출하려는 재벌위주의 경제계, 그리고 문화, 교육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갑과 을로 갈라 져 서로 상처만 키우는 현실이 마치 4대강위에 펼쳐지는 기분 나뿐 녹조처럼 아주 흉측하게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6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일본에 유명한 승려 작가 세토우치(93새)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안보법 개정작업을 반대하는 2천여 명의 시민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겪은 처참한 전쟁경험과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전쟁에 결사반대한다며 “최근 일본의 상황을 보면 점점 전쟁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전쟁도 좋은 전쟁은 없으며 모두가 살인이다.

이대로 가면 여러분의 아들들과 손자가 전쟁에 끌려가고 그리고 죽어간다.

현 상황이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귀를 귀울여 조심스레 들어보면 군화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고 하였다.
우리는 16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의 외세의 침략으로 많은 것을 잃어 버렸다.

임진왜란 6년7개월 동안 수십만의 인명피해는 물론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와 역사실록 등이 소실되었고 나라는 거의 거덜이 났다.…

오늘도 꿈꾼다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송병우 목사

무언가에 쫓겨서 도망 다니는 험한 꿈을 꾸다가 깨어나
“어휴, 꿈이라서 다행이네”하며 가슴을 쓰다듬는 일이 적지 않다.
어째서 나는 야곱처럼 주님 만나는 꿈이나, 요셉처럼 예언하는 그런 꿈이 아니라
이런 개꿈이나 꾸는 걸까… 탄식이 절로 나온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생시에도 꿈다운 꿈을 꾸며 살지 못하는 까닭임에 틀림이 없다.

꿈다운 꿈이란 비전(vision)으로서의 꿈이다.
비전은 先見之明의 선견, 즉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이다.
또 그것은 보다 높고,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고 설계하는 상상력이다.
想像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허상이나 망상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현실(像)에 대한 이해(想)이며,
또 그것은 희망찬 내일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꿈다운 꿈이란 또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것이 없이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것이며,
그것은 물이나 공기나 태양처럼 잠시도 없어서는 안되는 그런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이 없이는 살아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아직은 아닐지라도 우리 앞에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는 그 무엇이며,
그것은 현실보다 더 아름답고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꿈이 없는 백성은 멸망할 것이며 (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라고 잠언은 말한다. (29:18a/KJV)
한글 성경들은 이 구절의 ‘vision’을 문맥상 계시 또는 묵시라고 번역하지만
나는 ‘꿈’이라고 해석하기를 고집하고 싶다.
나라와 민족이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은 위로부터의 계시나 묵시가 없어서이기 보다는
그 백성에게 비전이 없기 때문, 즉 꿈다운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어서이다.

박완서 씨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의 TV드라마 버젼에서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사랑을 맹세하던 옛 애인에게서조차 또 배신을 당하자
여주인공(배종옥 분)이 뱃속에 남은 씨앗을 쓰다듬으며 절규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어째서 이 놈의 세상은 약속 지키는 사람을 만나보기가 이토록 어려운 거지?
난 이 아이를 낳아서 반드시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자!”
그런 그녀에게 배신한 애인은 답답하다며 일갈한다.
“이 맹꽁아! 약속? 아직도 그런 꿈을 꾸고 있어?”

참된 꿈이 점점 더 사라져가는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아직도 꿈은 소중한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머잖아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분은 내가 세상에 살면서 행하고 누리던 그 무엇 보다는
내가 어떤 꿈을 꾸며 살았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실 것만 같기 때문이다.
예수도 꿈을 꾸며 이 세상에 사셨다.
그가 꾼 꿈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꿈이었다.
그는 세상에 사는 동안 그 꿈을 위해서 힘써 일하셨고,
마침내는 그 꿈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예수는 그 꿈을 당신의 제자들에게와, 다시금 오늘의 우리에게도 넘겨주셨다.
내가 꾼 꿈을 너희도 꾸라고 하신다.

이제는 내가 지금껏 망상하던 온갖 헛꿈들을 깨고,
아주 아주 작게라도 예수 닮은 꿈을 꾸고 싶다.
산도 좋고 물도 좋은 곳에서 나홀로 행복한 그런 꿈일랑 꾸지 말자.
산이 좋은 곳에 가면 작은 샘물을 파고,
물이 좋은 곳에 가면 작은 징검돌 되는, 그런 작은 꿈을 꾸고 싶다.…

나의 삶과 평화의 교회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백형설 장로

평화의 교회 창립 40주년을 맞아 소감을 적으려하니 그 감회가 참으로 큽니다. 물론 저는 해람장로교회가 더욱 익숙하지만 이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제가 30대 초반에 설립되었고 20년을 섬겼던 교회였기에 이 교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 영향을 저에게 끼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는 저의 일생을 지배한 신앙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1974년이 저무는 때, 선친(백리언 목사)을 중심으로 교회 설립에 대한 의논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교육과 목회만을 평생의 할 일로 알았던 선친은 마지막 필생의 사역으로 이곳 LA에서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할 요량으로 1975년 1월 첫 주일에 해람장로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 기간은 불과 반년을 넘기지 못한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19년간 거의 식물인간으로 지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며 사명을 이어갔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선친을 옆에서 보아오면서 배웠던 저였기에 형식적인 신자로서의 삶은 그리 큰 문제가 없었지만 성장하며 또한 교회 운영에 직접 관여하면서 때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번민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이럴 때 아버지는 어떤 처신을 하실까?’를 생각하고 따르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예수님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 해답을 받았던 사실을 저는 성경에서 잘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에 간직하였던 신앙 자세는 제가 1995년 서울로 역이민을 감행하여 새로운 지역에서 이어가는 신앙생활에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특히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성장기인 30대와 40대를 보낸 신앙의 보금자리인 교회였기에 이에 대한 사랑은 남다른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나 하나의 힘으로는 결코 어떠한 일도 이룰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충실하게 나의 할 일을 감당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는 결코 인간의 뜻과 능력만으로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충성으로 섬기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 주신 곳이 ‘평화의 교회’ 였습니다. 이를 실천하면서 이렇게 깨닫게 하여주신 축복만으로도 이 교회는 저의 일생에서 신앙의 고향으로 자리매김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저는 교회법에 의해 작년 말로 장로직을 은퇴하였습니다. 그동안 남에게 드러내고 자랑할만한 신앙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손가락질을 당하는 처신을 하지 않은 보통의 신앙인이 될 수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이는 저의 젊은 시절에 지녔던 신앙의 연장이라 여겨집니다.

교회가 사회를 선도하는 것이 마땅한 때에 오히려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일이 생겨나는 현실이 부끄럽습니다. 교회의 양적인 성장에 목을 매는 듯한 목회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성경 말씀에 기초한 초대교회의 본심을 잊지 않는 교회가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예전의 교회로서의 ‘평회의 교회’가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그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창립 40주년을 축하합니다.…

평양교회의 몰락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문영조 장로

빨간 벽돌로 아름답게 지어진 평양의 교회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대동강변 늘어진 버드나무로 반쯤 가린 산정현 교회의 위용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주일 아침마다 뎅그렁! 뎅그렁! 울리던 그 종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스치는데, 아침 안개가 햇살에 먹혀 버리듯 그림자나 발자국도 없이 그렇게도 허무하게 사라진단 말인가?

소련의 모스크바에도 금빛으로 치장한 둥근 지붕의 교회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예루살렘에도 통곡의 벽이 버티고 있어 그 위용을 뽐내고 있건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 우던 평양과 그 많고 많던 교회들은 깨끗이 사라졌다. 그 이름만 들어도 온 천하를 호령하듯 위엄을 떨치던 교회들, 장대현 교회, 산정현교회 등 소위 삼현 교회들도 그 모든 기적과 미담들과 더불어 뜬 구름처럼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 곳은 일제 말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북쪽의 의인으로 불리던 조만식 장로가 섬기던 믿음의 제단이 있던 곳이다. 그 그루터기만 조금 남아 있어도 아시아의 옛 성지로 온 세계에 자랑 할 수도 있으련만…… 모든 것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흩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득한 하늘의 뜻을 어찌 짐작이나 하리오.

이름있는 선배나 학자들을 찾아 그 이유를 물어도 글쎄…. 하고 고개를 갸웃둥 하며 알 수 없다는 대답이다. 그러니 어찌하랴 이미 내 나이 고령에 어디가서 또 묻고 다니기만 할까.

외로운 평신도는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캄캄한 밤에 손을 더듬듯이 직접 나서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밖에 없다.

첫째는 다툼이다.

잘 나가던 산정현 교회의 분쟁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상처였다. 교회 문제가 아니요 의와 불의를 가리자는 싸움이 아니고 감정이 얽히고 설킨 시정 잡배들의 막장 비극이다. 10년을 넘게 싸우다가 결국 두 개로 나뉘고 그 여파가 타 지방 교회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며 퍼져 나갔다. J.C Smith가 1961년 7월에 발표한 연구 논문은 모든것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장로교가 세계에서 가장 분열이 심하고 그 끝이 안 보이는 분쟁 때문에 세계의 교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경이로운 집단” 이라고 했다.

둘째는 아메바 신앙이다.

예수 천당의 단순 신앙은 여러가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교회의 가르침이 실생활과 연결되지 못했다. 새벽기도와 철야기도가 일상 생활로 선하게 발전되지 못하고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지 못하게 되었다. 고상한 가치관이 정립 될 수 없는 성경만의 해석은 과장과 오류로 인한 시험에 빠질 경우가 허다할 수 밖에 없었다.

1910년 세계 선교협의회가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렸다. 그 곳에서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 다루어지고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내놓게 된다. 신학의 빈곤, 철학의 부재, 성서 하나에만 의존하는 교육, 맹목적 암송, 죄와 구속을 강조하는 웅변식 설교, 천편일륜의 주입식 교육들이 그 문제로 대두 되었다. 학문과 문학, 예술이 결여된 성서해석에는 결정적 오류가 따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정교 분리주의다.

일제의 박해 아래 어쩔 수 없었던 미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의 정교분리로 교회들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고 90%의 교회들이 신사 참배에 나서면서 그것을 변명하기 위하여 거짓 신학까지 만들어야 하는 굴욕의 세월을 보내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김일선 교우

우선 제가 하는 일부터 소개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저는 한인들도 많이 거주하는 글렌데일 교육구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한 일들의 9할 이상이 개별교육 프로그램(IEP) 통번역이었습니다. 어떠한 이유로 학생이 학업에 부정적 영향을 받는 경우, 교육구는 학생에게 특수교육을 제공합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교육을 받는 학생과 학부모가 언어적으로 불편을 겪지 않도록 IEP 모임 통역과 모임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 저의 주된 업무입니다.

지난 여름방학 동안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영화를 함께 보았습니다. 훌륭한 영화라는 평판이 자자한 ‘말아톤’이란 제목의 한국영화이었습니다. 마침 이 영화는 나의 일과도 크게 연관된 자폐 증상을 겪고 있는 자녀와 그 가족이 겪는 고통을 그린 영화로서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훌륭한 영화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도 하기 힘든 42.195 킬로미터 전 코스를 완주한 우리의 주인공 초원이에게 무한한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초원이를 위해 헌신의 노력을 다하는 초원이 어머니에게도 존경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작가나 감독이 하려는 이야기는 초원이에게 마라톤을 가르친 코치가 초원이 어머니에게 하였던 이야기, 즉 어머니의 헌신은 어머니 자신을 위한 위안이나 자기만족 또는 현실도피이지 고통을 겪는 초원이에게 도움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가족이 겪는 고통에 더 많은 초점을 두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실 외부 세상과의 교류보다는 자기만의 세계에 안주하려는 자폐아들이 이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말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우리 판단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자식에 대한 일방적인 모정에 휩싸인 어머니들은 객관적인 판단보다는 어머니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빠지는 것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폐아들 역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까닭에 실제로 이들에게 살아가는데 무엇이 필요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에게 대학에서 공부할 학습 능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지식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얼마나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을 하였을 때 비로소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원하기 때문에 달려야 했던 초원이는 정말 행복했을까요. 어머니에게 만족감을 제공하였다는 포만감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정말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만이 초원이는 진정한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제, 초원이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초원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을 사회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초원이가 필요한 수단을 사회가 제공하였을 때, 어머니의 소망은 초원이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것이 아니라 초원이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미 독립선언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초원이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을 때 우리는 공공의 복지 사회, 하나님의 나라에서 산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

(2013년 회지 “평화의울림“에 개제된 글입니다)

이만섭이만섭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우주는 혼돈의 상태였다. 혼돈, 카오스, 암흑, 그것은 무질서의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혼돈은 잠재질서라고 표현해야 맞다. 그것은 잠재성이다. 아직 ‘무엇’이라고 정의하여 부를 수는 없지만, 무엇으로도 될 수 있는 무한한 잠재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혼돈은 현대 천체물리학의 빅뱅이론과도 맞닿아 있다. 아직 분화되기 이전의 우주는 체적은 제로에 가까우면서도 질량은 무한대인 암흑의 상태였다. 그런 암흑의 상태가 현재와 같은 우주의 모습으로 진화되기 까지는 물론 137억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 시발점은 암흑상태였다.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 ‘힉스’라는 것이 있다. 복잡한 천체물리학적 설명을 잘 해낼 수는 없지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빅뱅 당시 암흑물질을 변화시켜 현재의 우주로 진화할 수 있게 한 입자라는 것이다. 힉스는 질량이 없던 다른 입자에 질량을 주고는 자신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천체물리학자들은 힉스 입자가 발견되면 그 동안 밝혀지지 않고 있던 우주 탄생의 비밀이 어느 정도는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류는 오래 동안 우주가 어떻게 태어났는 지 설명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우려 왔다. 여기에 인류가 쌓아온 온갖 지식이 동원됐으며, 과학 그 중에서도 물리학이 그 핵심에 있다.

그런데 힉스가 ‘발견’되면 정말로 우주 탄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설명이다. 힉스가 발견되면 현대 물리학의 기초가 되는 ‘표준이론’은 완성되지만, 표준이론이 모든 물리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궁극의 이론은 아니기 때문에, 힉스는 또 다른 물리이론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탄생의 비밀은 밝혀지지 않은 채 여전히 신비로 남을 것이다. 다만 좀 더 핵심에 가까워질 뿐이다.

아주 오래 전, 우리의 선조들도 우주의 탄생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음의 이야기는 중국의 창세신화를 재구성한 것이다. 여러 곳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나름대로 재구성하였다. 물론 창세신화가 중국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다. 그리고 이집트나 바벨론 등 고대 근동 지역의 창세신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히브리 성경에 등장하는 창조 이야기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 신화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질서의 출발점을 카오스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 옛날 아주 오래된 옛날, 웃기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생긴 것도 웃기고, 하는 짓도 웃긴 것이 정말로 웃기는 녀석이다. 그 녀석은 몸은 하나요, 다리는 여섯에, 날개가 넷인데, 머리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불그레하여 얼핏 보면 달걀 같기도 하고, 또 얼핏 보면 새 같기도 하지만, 날개 달린 것을 빼면 새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녀석을 새라고 불렀다. 머리가 없으니 당연히 눈. 코. 귀. 입이 없어 냄새도 맡지 못하고, 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한다. 정말 웃기지 않은가! 더 웃기는 것은 이 녀석이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잘 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여하튼 춤과 노래를 할 줄 아는 것만이 아니라 좋아한다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말이 안되지만 그런 녀석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황제의 강(帝江)’이라고 하였다.

세월이 흘러 ‘황제의 강’은 어찌어찌 하다 세상의 중앙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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