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오면
나는 4•19혁명이 터지던 때 대학 상급반이었다. 당일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교정을 떠나 아현동과 서대문을 지나 시청 근처의 옛날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한 무리의 청년들이 남대문 쪽으로부터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그들은 ‘독재타도’‘선거무효’등을 외치며 중앙청으로 직진했다. 흑석동에서 한강다리를 건너 머나먼 거리를 달려온 C 대학이었다. 관성의 법칙인가? 뛰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 중앙청 앞으로 몰리게 되고 길 옆 정부청사에 포진한 무장경찰들 총격에 그대로 노출되니 그 희생이 수십명에 이르렀다. 이들과 더불어 많은 피해를 본 대학은 서울 문리대와 동국대였다. 동숭동 대학로에 있던 문리대는 제일대로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도착하여 많은 피를 흘렸고, 제 이대로 남산의 동국대가 효자동 길로 들어서며 한 키가 넘는 하수도용 둥근 콘크리트를 굴리며 경무대로 돌진하니 그 기세가 마치 탱크부대를 방불케 하였지만 또한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던 K 대는 희생자나 사망자가 없었지만 다수 부상자가 있었고, Y 대는 의예과 한 명이 사망하고 또한 부상자가 많았다. 아! 그 순수했던 학생의거, 온 아시아의 대학생들의 가슴을 뭉클케 하며 부러워하게 했던 혁명, 특별한 주동자도 없이 반나절 학생회 간부들의 전화연락으로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것은 동시 다발로 일어난 비폭력 민주화 운동으로 인류역사에 3•1운동과 더불어 영원히 기록될 쾌거였다.
과연 4월은 잔인하다
영국시인T.S.Eliot 는 ‘황무지’ (The Waite Land)로 이름을 날렸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라일락은 죽은 땅속에서도 밀어 올린다. 우리의 잃어버린 기억과 포기한지 오랜 욕망까지 섞어가며 메마른 흙덩이와 지저분한 자갈밭에서 솟아나는 떡 잎을 보라. 신의 자비 같은 것은 눈 씻고 보려해도 없는 척박한 땅, 황무지에서 새 생명은 솟아난다. 34살에 만든 이시는 그가 왜 영국보다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우리의 4월의 역사는 과연 잔인했다. 1948년의 4•3제주학살, 1960년의 4•19, 1992년의 L.A 4•29 인종폭동, 또 이웃에서 일어난 톈안문 사건도 1976년 4월이었다.
4월이 오면 슬프다. 어깨동무하고 뛰어갈 때 박가는 6척 거구였다. 올려 걸친 바른팔이 불편했지만 그대로 1시간여를 참았다. 왼쪽의 장가는 그 순한 얼굴로 나를 힐긋힐긋 쳐다보며 미소를 보냈지.재작년 방문 때 키다리 박가가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단다. 몰려오는 추억과 슬픔이 온 몸을 감싸왔다.
이제 4월은 새롭게 기어될 것이다. 잔인하고 슬프던 4월은 어디로 가고 봄 빛이 찬란하다. 날아 갈 것 같은 봄 처녀의 들뜬 마음이다. 심장이 기뻐 뛰는 듯하다. 70년 만의 봄 소식, 판문점 도보다리와 나무소리, 새 소리, 꽃보다 더 아름다워지기를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두 인간의 움직이는 입술과 애절한 눈동자 그러나 감각으로 전해오는 ‘평화’, ‘평화’라는 듀엣에 봄바람과 새소리가 협주하는 광경, 앞서 간 두 선배가 뿌리고 가꾼 나무에 열매가 영글참이다. 그렇다. 4월은 잔인하다. 그러나 잔인 속에 솟아나는 평화가 참 평화다. T.S.Eliot, 그는 참을성이 부족했다. 최소한 70년은 기다렸어야지. 아! 4월, 이제부터는 그 이름이 평화다. 그 이름 평화, 달고 오묘하지 아니한가?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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