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꿈꾼다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송병우 목사
무언가에 쫓겨서 도망 다니는 험한 꿈을 꾸다가 깨어나
“어휴, 꿈이라서 다행이네”하며 가슴을 쓰다듬는 일이 적지 않다.
어째서 나는 야곱처럼 주님 만나는 꿈이나, 요셉처럼 예언하는 그런 꿈이 아니라
이런 개꿈이나 꾸는 걸까… 탄식이 절로 나온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생시에도 꿈다운 꿈을 꾸며 살지 못하는 까닭임에 틀림이 없다.
꿈다운 꿈이란 비전(vision)으로서의 꿈이다.
비전은 先見之明의 선견, 즉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이다.
또 그것은 보다 높고,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고 설계하는 상상력이다.
想像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허상이나 망상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현실(像)에 대한 이해(想)이며,
또 그것은 희망찬 내일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꿈다운 꿈이란 또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것이 없이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것이며,
그것은 물이나 공기나 태양처럼 잠시도 없어서는 안되는 그런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이 없이는 살아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아직은 아닐지라도 우리 앞에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는 그 무엇이며,
그것은 현실보다 더 아름답고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
“꿈이 없는 백성은 멸망할 것이며 (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라고 잠언은 말한다. (29:18a/KJV)
한글 성경들은 이 구절의 ‘vision’을 문맥상 계시 또는 묵시라고 번역하지만
나는 ‘꿈’이라고 해석하기를 고집하고 싶다.
나라와 민족이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은 위로부터의 계시나 묵시가 없어서이기 보다는
그 백성에게 비전이 없기 때문, 즉 꿈다운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어서이다.
박완서 씨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의 TV드라마 버젼에서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사랑을 맹세하던 옛 애인에게서조차 또 배신을 당하자
여주인공(배종옥 분)이 뱃속에 남은 씨앗을 쓰다듬으며 절규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어째서 이 놈의 세상은 약속 지키는 사람을 만나보기가 이토록 어려운 거지?
난 이 아이를 낳아서 반드시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자!”
그런 그녀에게 배신한 애인은 답답하다며 일갈한다.
“이 맹꽁아! 약속? 아직도 그런 꿈을 꾸고 있어?”
참된 꿈이 점점 더 사라져가는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아직도 꿈은 소중한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머잖아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분은 내가 세상에 살면서 행하고 누리던 그 무엇 보다는
내가 어떤 꿈을 꾸며 살았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실 것만 같기 때문이다.
예수도 꿈을 꾸며 이 세상에 사셨다.
그가 꾼 꿈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꿈이었다.
그는 세상에 사는 동안 그 꿈을 위해서 힘써 일하셨고,
마침내는 그 꿈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예수는 그 꿈을 당신의 제자들에게와, 다시금 오늘의 우리에게도 넘겨주셨다.
내가 꾼 꿈을 너희도 꾸라고 하신다.
이제는 내가 지금껏 망상하던 온갖 헛꿈들을 깨고,
아주 아주 작게라도 예수 닮은 꿈을 꾸고 싶다.
산도 좋고 물도 좋은 곳에서 나홀로 행복한 그런 꿈일랑 꾸지 말자.
산이 좋은 곳에 가면 작은 샘물을 파고,
물이 좋은 곳에 가면 작은 징검돌 되는, 그런 작은 꿈을 꾸고 싶다.
옆 사람에게는 작은 미소, 따듯한 한 마디 말로 곁을 주는, 그런 작은 꿈을 꾸고 싶다.
아무렴, 바로 그런 꿈이 천국가는 꿈이련만
여전히 개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주여 도우소서.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밤과 아침에 계시로 보여주사 항상 은혜를 주옵소서…
인생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이 찬송이 진정 나의 찬송이 될 수 있기를 오늘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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