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갓진 山길 가에 이름모를 靑綠 야생초를 만났습니다

한갓진 山길 가에 이름모를 靑綠 야생초를 만났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岩面에 혼자서도 端雅하고 듬직하기만 합니다
(연한 뿌리로 유기산을 분비해 바위를 녹이고 무기질을 취하여 산다고합니다. 억척스럽습니다)

“뭐, 그런 교회를 다녀?”
불현듯! 항간에 야멸찬 눈총도 의연하게 버텨야하는 ‘평화의 교회’ 그리고 교인 (나),
친교실벽에 (6.25 68주년 바로 전날, 아무렇지도 않게) 太極旗와 나란히 내걸린 人共旗의 급작스런 隔世感 등등…
애써 무심코 살려던 온갖 雜感들이 교회와 겹쳐 선불을 맞았습니다.

海籃 !
‘누구라도 다 오라! 바다같이 넓은 품’이라 읽혀져 넉넉하고 푸근한 교회 이름였습니다.

너 나가라, 딱히 내쫓는 자는 없었지만 달리 어째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한살 반 딸애와 萬里異域에 달랑 우리뿐일줄 알았더니
생전 처음, 교회라는 곳에는 속내 하얀 사람들이
빈 맘으로 휘청대던 우리게 위로이고 버팀목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저러 40년! 교회는 이름마저 바뀌었고
업고 온 한살 반 딸애는 이교회 마당에서 뛰다 시집 가 두 딸의 엄마 됐고
곱던 아내는 ‘하미’가 됐습니다 (딸의 딸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발음이 어렵다고 하미 하지라 부릅니다)
나 또한 하릴없이 노인되어 책 몇줄 읽을래도 앞으로 읽어나가는 속도와 뒤에서 까먹어 들어오는 속도가 비슷합니다.

나고 자란 내나라에 살던 세월보다 移民살이가 더 길어진 지금
주일 아침마다 교회 마당을 쓸던 엄마도 명을 달리하신지 어느새 십수년
그나마 살갑던 사람들 하나 둘 다 떠나고
어차피, 돌아가기 보다는, 남은 세월 맘 붙이고 살아야할 고향같은 교회
빈 마당이 자못 (생각보다 훨씬) 虛虛합니다.…

싱가포르 회담 이후의 남북미 관계에 대한 토론회

평화의교회는 6월 24일 친교 시간 후 ‘싱가포르 회담 이후 남북미 관계를 전망한다’는 주제로 윤길상 목사님을 모시고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180624 싱가포르 회담 이후 남북미 관계를 전망하는 토론회 Program

Watch this video on YouTube.…

김준하 군의 첫 설교

버클리 장로교회에서 지난 세족 목요일에 행한 김준하 군의 설교입니다.

special services- Maundy Thursday 25분 40초부터

이렇게 큰 교회는 전업 홈페이지 관리자가 있을 터인데도 두 달만에 설교를 올리니 우리 교회에서 용호 장로에게 ‘늦게 올린다고 뭐라 하면 안되겠구만’

http://www.fpcberkeley.org/avms.asp

4월이 오면

4월이 오면
문 영 조

나는 4•19혁명이 터지던 때 대학 상급반이었다. 당일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교정을 떠나 아현동과 서대문을 지나 시청 근처의 옛날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한 무리의 청년들이 남대문 쪽으로부터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그들은 ‘독재타도’‘선거무효’등을 외치며 중앙청으로 직진했다. 흑석동에서 한강다리를 건너 머나먼 거리를 달려온 C 대학이었다. 관성의 법칙인가? 뛰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 중앙청 앞으로 몰리게 되고 길 옆 정부청사에 포진한 무장경찰들 총격에 그대로 노출되니 그 희생이 수십명에 이르렀다. 이들과 더불어 많은 피해를 본 대학은 서울 문리대와 동국대였다. 동숭동 대학로에 있던 문리대는 제일대로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도착하여 많은 피를 흘렸고, 제 이대로 남산의 동국대가 효자동 길로 들어서며 한 키가 넘는 하수도용 둥근 콘크리트를 굴리며 경무대로 돌진하니 그 기세가 마치 탱크부대를 방불케 하였지만 또한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던 K 대는 희생자나 사망자가 없었지만 다수 부상자가 있었고, Y 대는 의예과 한 명이 사망하고 또한 부상자가 많았다. 아! 그 순수했던 학생의거, 온 아시아의 대학생들의 가슴을 뭉클케 하며 부러워하게 했던 혁명, 특별한 주동자도 없이 반나절 학생회 간부들의 전화연락으로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것은 동시 다발로 일어난 비폭력 민주화 운동으로 인류역사에 3•1운동과 더불어 영원히 기록될 쾌거였다.

과연 4월은 잔인하다
영국시인T.S.Eliot 는 ‘황무지’ (The Waite Land)로 이름을 날렸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라일락은 죽은 땅속에서도 밀어 올린다. 우리의 잃어버린 기억과 포기한지 오랜 욕망까지 섞어가며 메마른 흙덩이와 지저분한 자갈밭에서 솟아나는 떡 잎을 보라. 신의 자비 같은 것은 눈 씻고 보려해도 없는 척박한 땅, 황무지에서 새 생명은 솟아난다. 34살에 만든 이시는 그가 왜 영국보다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우리의 4월의 역사는 과연 잔인했다. 1948년의 4•3제주학살, 1960년의 4•19, 1992년의 L.A 4•29 인종폭동, 또 이웃에서 일어난 톈안문 사건도 1976년 4월이었다.
4월이 오면 슬프다. 어깨동무하고 뛰어갈 때 박가는 6척 거구였다. 올려 걸친 바른팔이 불편했지만 그대로 1시간여를 참았다. 왼쪽의 장가는 그 순한 얼굴로 나를 힐긋힐긋 쳐다보며 미소를 보냈지.재작년 방문 때 키다리 박가가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단다. 몰려오는 추억과 슬픔이 온 몸을 감싸왔다.
이제 4월은 새롭게 기어될 것이다. 잔인하고 슬프던 4월은 어디로 가고 봄 빛이 찬란하다. 날아 갈 것 같은 봄 처녀의 들뜬 마음이다. 심장이 기뻐 뛰는 듯하다. 70년 만의 봄 소식, 판문점 도보다리와 나무소리, 새 소리, 꽃보다 더 아름다워지기를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두 인간의 움직이는 입술과 애절한 눈동자 그러나 감각으로 전해오는 ‘평화’, ‘평화’라는 듀엣에 봄바람과 새소리가 협주하는 광경, 앞서 간 두 선배가 뿌리고 가꾼 나무에 열매가 영글참이다. 그렇다. 4월은 잔인하다. 그러나 잔인 속에 솟아나는 평화가 참 평화다. T.S.Eliot, 그는 참을성이 부족했다. 최소한 70년은 기다렸어야지. 아! 4월, 이제부터는 그 이름이 평화다. 그 이름 평화, 달고 오묘하지 아니한가?
-2018년 4월-…

문재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신이 인간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고통을 감수하였습니다. 어제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이 고통이 아니고 오히려 보통 사람도 견딜만할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거나 행복의 근간을 이룰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무엇이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매진할 때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표상을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바울)

문재인은 이웃을 자기몸과 같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이웃 북한을 견원지간에서 동반자로 변화시켰습니다. 또 먼 미국을 끌어 들였습니다. EU를 어깨 동무로 삼았습니다. 러시아도 우리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저와 같은 보통 사람들도 할 수 있을 같은 일입니다. 단지 기회가 없었거나 그러한 상황이 적절하게 주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의 드라이브가 더욱 돋보이는 것일 겁니다.
역사는 반복합니다. 반복하지 않는다는 말도 또 믿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직시하는 아이러니입니다.
남북관계 북미관계 여타 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세계 상황도 예측 가능하면서도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내일은 예측되는데 모레는 안개 속에 숨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성과있는 진전을 바란다면 앞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세종대왕이 난관을 헤쳐 나가 한글을 우리 모두에게 선사했듯이, 바울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듯이 말입니다.

안개 속에 있던 통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문재인이 좋습니다. 80년 인생에 처음 경험하는 지도자상입니다.

남북화해는 한반도의 통일과 세계 평화를 위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소시민이면서 평화의 교회 교인인 채희탁이 씁니다.…

한국의 가짜 보수

진정한 보수는 자기 희생에 앞장선다.노불리스 오불리즈를 기뻐 실천하는 무리다. 1.2차세게대전에 제일 먼저 참전하여 평민보다 훨씬 많은 희생을 치른 영국의 귀족들이 참보수다.
첩첩히 쌓여진 고전의 가치를 보전하고 문학,철학,정치의 현대화를 실천하는 영국 지식인들의 자연스런 진리의 발현은 어쩔수 없이 세계문화를 선도한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질책당한 바리새파도 대표적인 보수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정직한 헌금으로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고 크고 작은 집회마다 정장 차림으로 경건을 지키며, 꾸준한 기도로 자신을 추수리고시정무리 앞에서도 타의 모범을 보였다. “너희의가 서기관과 바리새파보다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못하리라” 이말씀은 예수도 그들의 기초윤리를 인정하는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보수는 진보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진지한 노력과 자기 관리가 요구되는 집단이다.

한국의 보수는 어떠한가? 우선“종북좌파”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닌다. 선한 전통을 이어받기보다 사기,도둑질에 전념한다.그러나지적을 받으면 날카로운 보검을 휘두르며 달려든다. “종북좌빨”, “빨갱이” 등 전가의 보도다.이것 한방이면 모든 허물과 죄악은 거품처럼 사라진다. 머리띠 두르고 태극기까지 휘두르면 완전무장이다.신분상승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애국자로 변신하게 된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하늘의 축복받은 자로 자타가 인정한다.가롯유다는 은삼십을받고 예수를 팔았지만 곧 후회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한국의 자칭보수는 도둑질과 증거말살과 빨갱이 만들기와 거짓증언까지 인간 최악의 죄악들을 다모아놓고 굿판을벌린악마들의 두목이다.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가짜 보수다. 한마디로 고급 양아치가 되어버렸지만 그 사실을 자신도 주위도 알수가없다.
왜?그의 입에는 “저놈좌파빨갱이야”가 거침없이 붙어다니며 그를 동행하면서 밀어주니까.
천행인지 촛불 혁명으로 새정부가들어섰다.혼신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한국은 미래가없다.
마지막 기회다.특히 종교 사기꾼을 멀리하고 누적된 600년의 해악을 청산하라.
그래야 그대도 그대의 후손도 살아나고 나라도산다.…

채희탁 성도 기고문

나태

나태는 온갖 사랑의 시초이다.(Clusta Wolf) 나태함은일곱가지 대죄의 하나이지만 사람을 비롯한 모든 선한것의 근원이기도 하다.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다 “나태는 모든 악덕의 시초이며 모든 덕의 압권이다”라고. 역설적이지만 나태해질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 사회는 악이다. 나는 성실함과 나태함 중 선택의 여지를 주지않고 열심히 살라고만 강요하는 사회가 가장 악한 사회라고 믿는다. 같은 맥락에서 불순종 할 자유를 주지않고 복종만 요구하는 부모가 가장 악한 부모이다.영적 기복을 불허하고 헌신만을 외피는 목회자가 가장 악한 목회자이다. 헐덕이며 이익을 추구하는 시간이 가장 무익할 수 있고 아무것도 하지않는 비효율적 시간이 가장 유익 할 수도 있다 . 빠름의 추구는 항시 폭력과 전쟁으로 귀결되며 느림과 나태야 말로 역사의 진정한 동력임을 우리는 어느때에 가서야 믿게될까? 나의 개임적인 고백이다. 항상 느려터지고 무슨일이든 내일로 미루려고 한다. 한마디로 나태하기 이를때 없음을 고백한다. 그렇다고 해서 볼트가 나태를 온갖 사랑의 기초라고 한다면 이는 무리한 말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나태로 인해 내 인생은 지금의 이꼴이 되었는데 그리고 이 나이에도 여전히 나태한데 어찌할꼬. 나태가 칠거지악 중에 하나라는 것이 나에게는 분명해 진다. 그래도 혹 황혼이 저 앞에서 곧 꺼질려는 불빛을 붙들어 매어 나에게서 나태에서 벗어나라고 한다면 나는 어찌하여야 하는가?

행복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세계와 감정세계는 수백만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물학적 체제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가름 모든 정신적 상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복도 월급이나 사회관계 정신적 권리 같은 외부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경, 뉴런, 시빕스, 그리고 세로토닌, 도파인, 옥시토신 등의 다양한 생물학적 물질에 의해 걸정된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집을 사거나 승진하거나 심지어 진정한 사랑을 찾거나 하는 일로 행복해지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밖에 없다. 바로 신체 내부의 쾌락적인 감각이다. 방금 복권에 당첨되거나 새로운 연인을 찾아서 기뻐 날뛰는 사람은 실제로 연인이나 돈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혈관속을 요동치며 흐르는 다양한 호로몬과 뇌의 여러 부위에서 나오는 전기신호의 폭풍에 반응하는 것이다. 지상에 낙원을 창조하려는 희망을 가진 모든이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의 내부 생화학적 시스템은 행복수준을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듯 하다. 자연 선택은 보통 말하는 의미의 행복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생각은 지상의 낙원을 창조하려는 희망을 가진 모든이에게 불행한 일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정신세계와 감정세계가 생물학적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불행을 불행으로 지속시키거나 가중시키지 앟고 이를 불행을 거르고 걸러서 그 불행에 대한 정신과 감정을 오히려 미화하는 과정을 거치므로서 그 불행을 행복으로 변환시킴을 뜻한다. 그래서 우라는 그 불행중에도 삶을 유지할 뿐 아니라 이때 창조적 활동을 활발히 전재한다. 길동무가 그렇다. 아픔이 없는 행복은 행복일 수 없으며 그런 행복은 존재한바 없다.레이저 핵 융합기는 일말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한 장치이다. 192개의 레이저는 바늘끝 만한 샘플 덩어리가 균일하게 내파되도록 정확하게 조준되어야 한다. 위치뿐만 아니라 시간도 중요하여 192개의 레이저 빔은 300억분의 1초라는 오차 범위 안에서 동시에 도달해야 한다.…

희망은 고통과 함께

(채희탁)

고통만큼 시야를 명료하게 하고 주위를 잘 보게 하는것도 없다. 플라톤의 말처럼 고통은 영혼의 질서를 회복해 낸다. 시인 루미는 고통이 무관심의 가지들을 털어낸다고 말한다. ‘찌르는 가시들이 당신의 어떤 사유보다도 더 멀리 대려 갈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고통은 출생, 오르가즘, 사랑, 죽음과 같은 인생사의 경험을 제공한다. 고통은 너무 생생해 비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중화제 역할을 한다. 당신이 직접 고른 중화제는 아니더라도 아주 효과적인 것이다. 다음에 당신이 진정한 고통속에 있게 될 때, TV쇼나 새로운 가전제품, 깨끗한 집, 혹은 당신의 이력서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살펴보라. 그것들 중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당신을 보살피기 위해 모든 일을 포기한 누군가가 가져다 준 차가운 물 한잔이다. 담요 몇 장, 마른 베개도 도움이 될 것이고 당신이 울면 집안에 누군가가 들을 거라는 사실도 도움이 된다. 그 이상은 기대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내생각 같아서는 다윈의 진화론에 한마디 덧부쳐야겠다. 진화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항 것은 고통(Pain)이고 이 고통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모든 생물을 뛰어넘는 인간이 되게 한 핵심요소로서 이성적 인간이 되게 한 것이다. 인류의 앞날에 희망을 걸어보자. 그 희망은 간헐적인 아픔을 동반(수반)하여야 한다.…

1 2 3 4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