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언제쯤 너그러워질까?-신해철을 보내며
가수 신해철씨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뉴스M과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는데 지금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회수가 너무 많아 저도 조금 어리둥절 한데요.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니 기분은 좋네요. 교우들과 함께 나눕니다.
신해철의 쾌변 독설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소년은 막연히 신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선택과목으로 독일어를 택했고(19쪽), 대학은 철학과로 진학했다.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와 ‘성채’,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으면서 성장한 소년은 스물한 살 때인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연예인이 된다. 가수 생활을 하면서도 신부 서원으로 인한 결벽증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첫 성경험이 늦은 것”(18쪽)도 그 때문이었다.” 교회(성당)의 경직된 분위기가 싫어 가톨릭을 떠났지만 교적은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후벼 파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심성이 곱던 그가 어머니에게 참척(慘慽)의 슬픔을 남기고 먼저 갔다.
가수 신해철이 46세 젊은 나이에 이 세상과 이별했다. 위키 백과는 신해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신해철(1968년 5월 6일 ~ 2014년 10월 27일)은 대한민국의 가수 및 음악 프로듀서, 사회운동가이다. 대중에게는 1992년 결성된 록그룹 N.EX.T의 보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서태지와 함께 1990년대를 상징하는 뮤지션 중 하나이다.
나는 그의 노래에 대해서 잘 모른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재즈카페’는 들어보았는데 그것도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에서 자우림 밴드의 김윤아를 통해서였다. 다시 말해 나에게 그는 가수라기보다는 용감한 투사였다. 그래서 위키백과는 사회 운동가로 부른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안에 대해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언사를 일부에서는 ‘독설’이라고 했고 마니아층에서는 ‘마왕’으로 불렀다. 정치인들과 교수들이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적당히 몸을 사리다 들어가는 것을 못 참겠다는 듯이 그는 한쪽 진영에 서서 자기의 입장을 확실히 했다. 점잖은 체하는 분위기를 못 견뎌 하던 ‘정상인’이었다.
신해철은 음반 말고도 책을 남겼다.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가 인터뷰한 (부엔리브로, 2008년)은 신해철의 모든 것을 담았다. 인터뷰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지승호가 인터뷰할 정도로 신해철은 자기 세계가 확실한 가수였다. 책에서 신해철은 국가, 종교, 사회, 문화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특유의 독설로 풀어낸다. “오죽하면 개독교라고 욕을 먹겠는가”라며 “헌법대로라면 기독교도 모조리 감방에 보내야 한다. 협박공갈죄로”라고 기독교를 폄훼한다.
이어서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 시장 재직 시절 서울시 봉헌 발언이나 2007년 조승희씨의 버지니아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당시 주미대사인 이태식씨의 금식기도 제안을 강하게 비판한다. 굶으려면 혼자 굶으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조승희씨가 한국인이었다고 해서 미국 사회에 대한 굴욕적인 사과(동포들의 금식기도로 참회)를 제안한 이태식 대사의 발언이 언론에서 크게 비판받았었다.
또한 기독교가 자기 생활을 침해할 수 있기에 방어차원에서 기독교를 싫어한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경계하는 게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믿으면 상관이 없는데 저 사람들이 내 생활 안으로 파고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생활을 침략하고, 공격해 들어오니까 방어를 해야 되는 거죠.(중략).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손에 맥콜 음료수를 들고 있었어요. 그게 일화에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통일교 기업이고, 지나가던 한 여자가, 제가 보기에는 뭔가 광기가 들린 듯한 특유의 번쩍거리는 눈동자로 저를 보는데, 정말 무서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