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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Archives: 평화서당

[평화서당] 바울의 정치신학 1장: 로마서의 수신자

타우베스는 로마서의 도입부와 후반부를 분해해서 다른 편지들과 다른 점을 집중 분석한다.

  1. 예수가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고린도서와는 다르게 강조된다. -> 이것은 후반부 반전 밑밥인듯.. 타우베스도 로마의 카이사르를 언급만 하며 분위기만 띄움(…)
  2. 바울의 사도 자격은 당시 전반적으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에서는 기존의 교회 체계와 그 사도들을 “사람에게서 받은 사도”라고 거의 공격조로 언급하면서 대신 자신은 예수와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사도직이라고 자기 변호를 한다. 그렇지만 로마서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 중 로마 교회는 자신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쪽에 더 많이 관여한 다른 사도들의 눈치를 본 듯) 대신 평소와는 달리 훨씬 길게 더 예수의 계보와 신성에 대해 기술 한 후 자신의 사도직은 한마디로 짧게 예수의 후광 뒤에 숨어서 마무리한다.
  3. 예수에 대한 설명도 다르다. 갈라디아서는 예수의 구원 사역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지만, 로마서는 예언자들과 성서(구약) 그리고 다윗, 이렇게 세가지 핵심 키워드를 언급하고 있다. 예레미야서의 문체를 흉내낸 것은 보너스.. 뭉뚱그리자면 갈라디아서는 (전통을 거의 배제한) “신약적인” 관점, 로마서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이 밑밥도 더 이상 설명을 안 한다…)
  4. P.44 에 “소위 순방 여행이라는 픽션”이라는 너무 눈에 띄는 표현이 두번 나오는데 번역이 덜 된 듯. 자세한 것은 나중에 원문을 볼 필요가 있다. (원문의 표현이 애초에 모호한데다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대충 넘겼을 가능성도 있음)
  5. 상기 1번에 나온 예수의 신성과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언급이 담긴 편지를 로마의 교회에 보냈다는 것의 상징성. 당시 로마에도 편지 검열관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반란 시도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편지를 열어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정기적으로 이런저런 종교모임이나 사교모임에 가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거나 (완전 열심히 일하는군?). 일반적으로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낭독하게 된다. 그런데 그 편지에서 직설적으로 자신들의 신이 세상의 왕이니 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은 카이저와 로마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해석을 바우어가 이미 했고 타우베스는 그에 대해 동의한다며 언급을 한다.
  6. 1장의 파트B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헌금이 다뤄진다. 타우베스는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아스포라 유대교 공동체와 예루살렘의 유대교 공동체를 이해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여러가지 역사적 사례를 동원해 이를 설명한다. 그리고 1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대교의 여러가지 종교 구조들 – 지리적 단위로 존재하는 종교 공동체(번역본에는 러시아 지부, 폴란드 지부 등으로 나옴), 유대인 중앙위원회 등 -의 오늘날 특성이 종교기관의 특성 상 바울 활동 당시에도 여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7. 이 부분에 들어서면서 타우베스는 이따금 짜증을 내는데, 정황으로 봐서 이 학회 발표 이전에 타우베스는 당대의 신학자들과 여러가지 토론을 이미 했고 토론의 결과 신학 또는 초대 교회사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본문에서: “이 사실[고대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세보메노이들의 당대 영향력]에 대해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대가리 머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정작 초기 교회의 사회문화적 하부 토대가 되는 유대교와 유대교 종교 기관의 특성에 대해 대충 알거나, 연구하기 편한 지역만 중심으로 연구를 하거나, 그냥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한심 당황했을 것으로 보인다.

[평화서당] 바울의 정치신학 영어 번역본 및 독어 원문

책을 읽다가 또 번역이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1부 44쪽에 “뭉크(다른 저자 이름)처럼 그렇게 문학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봤습니다.” 라는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게 이상한 이유는 바로 앞 부분에서 뭉크를 얘기하면서 마치 뭉크가 바울이 세계 끝까지 가서 민족들을 모으려고 했다는 부분에 대해 과대 해석을 했다는 뉘앙스로 쓰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문단에서 “뭉크처럼 원문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겠지만”라고 쓰는게 더 자연스럽게 연결 됩니다.

갑자기 의심이 들었습니다.  영어는 “그대로”와 “문학적으로”가 literally 와 litera(…? 이건 단어가 뭐가 될까요?)인 서로 비슷한 두 단어가 있지만, 온라인 독어 사전을 검색해보니 “그대로”는 wörtlich, “문학적으로”는 뭔지 모르겠지만 어쩃든 어미가 literatur로 시작하는 단어.. 이 두 단어가 생긴게 많이 달라서 혼동의 여지가 없습니다. 혹시 역자가 독어가 아니라 영문 번역본을 재번역하면서 literally 를 “문학적”으로 잘못 해석한것은 아닌가?

영어 번역본을 찾아보았습니다. 구글 북스에 스캔되어 있고 OCR 처리까지 되어있어 잘 검색되더군요.

The Political Theology of Paul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You don’t have to see this as literalistically as he does, but he did see something.

literalistically 라는 표현은 처음 봅니다.. 여기서부턴 영문 역자도 마구마구 의심되기 시작했습니다.

독어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구글북스 독어본에는 저작권 문제로 열람이 안 되고 제한적 검색 결과 표시만 되도록 되어있어서 확인이 어려웠으나, scribd 에 전문 스캔본이 다운로드가 가능한 형태로 있더구요

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Man braucht es nicht so literalistisch zu verstehenwie er, aber etwas hat er gesehen.

사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단어에 gg 쳤습니다.. 저거 번역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따라가기 힘든 책이니까 대신 애꿎은 역자를 도마에 올리고 싶으신 분은 상기 두개 원문 및 번역본을 참고삼아 즐거운 메타 비판의 세계로 떠나시면 되겠습니다..…

[평화서당] 성서와 대안좌파 1장: 새로운 세속주의

평화의교회에서는 격주 독서모임 “평화서당”을 통해 함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읽는 문헌은 로랜드 보어의 “성서와 대안좌파” 입니다. 둘째주는 제가 1장 후반부를 발제하게 되어 아직 참여하지 않은 교인분들의 관심을 유발하기 위해 발제문을 올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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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45-61p 의 내용을 정리하고 질문을 몇가지 던져봅니다.

제일 먼저 드는 의구심은 세속좌파, 종교좌파, 구 세속좌파, 후기세속좌파, 그리고 저자가 제안하는 wordly left (대안좌파) 등의 분류가 실체를 가지는 분류냐는 것입니다. 마치 이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서로 연합을 이루거나 분파를 해서 경쟁하거나등의 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1장 전반부의 내용인데, 일부 학계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표현은 아닌지, 혹시 저자만 쓰는 표현인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잘 못 보는 표현들입니다. 세상의 운동을 아주 크게 분할 해 놓으니 멋은 있는데, 실제로 세력을 이루지 않은 부류들을 카테고리화 해놓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장 후반부를 읽어나가다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레고성경이야기 (The Brick Testament) 라는 웃긴 웹사이트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 웹사이트는 자칭 (우스개로?) 목사라고 하는 스미스라는 개인에 의해 운영되는데, 성경의 여러 잘 알려진 이야기들을 가끔은 비꼬아서, 가끔은 적혀있는 그대로 레고 조각을 이용해서 연출을 하는데, 연출 수위가 많이 높습니다. 아래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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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서 봐야 하는게 이거 아무 생각없이 돌리다가 엉뚱한 장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순식간에 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 의하면 스미스는 무신론자라고 하는데, 레고이야기의 목적은 성경이 대부분의 기독교 외부 사람들 (그리고 내부 교인들도 포함해서)이 상상하듯이 고상한 이야기만 하거나 권력 체제를 유지하는 말만 있는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웹사이트로부터 출발해서 우파의 도구로서 인식되어 있는 성서를 해체하고, 성서가 해방적인 방향으로도, 그리고 체제유지의 방향으로도 해석 될 수 있다는 점을 논변합니다. 우파가 성경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변론하듯이 좌파 또한 성서를 포기하지 않고 해석 투쟁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결론나지 않는 의문이 나오는데요, 일반적으로 문서에 대해서는 그 문서에 “원래의 의도”가 존재하고, 문서를 가지고 그 의도와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남용”(abuse)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저자는 성경의 경우 그것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는 그 자체로 가치관적인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는 원래의 의도가 없거나 서로 상반되는 여러가지 의도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라고 말하는데, 이 점에 대해 더 이상 논지를 펼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론 이것을 전제로 하고 계속 주장을 펼쳐나갈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간략하게 전제를 주장하는 것이 충분한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3장에서는 같은 사건에 대해 헤게모니적인 읽기, 그리고 전복적인 읽기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는데 계속 가치관적인 평가가 전제로 깔려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이어서 좌파적인 전통에서 종교좌파들의 역할과 좌파적인 성경해석들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훑어봅니다. 이 부분은 잘 정리가 되어있고, 제가 느끼기에 새로운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미국 주류 진보 운동에서 종교계는 하나의 부문로 자리잡은지 오래고, 공산주의 계열부터 환경운동에 이르기까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