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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Archives: 38주년 (page 2)

그리운 편지

(2013년 회지 “평화의울림“에 개제된 글입니다)

김인숙요즈음에는 너 나 없이 편지를 잘 쓰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화로 문안도 하고 또 필요한 전달사항을 전자메일로 보내던가 또는 휴대전화를 통해서 문자를 보내서 즉시즉시 필요한 일들을 해결한다. 편지지 위에 마음을 가다듬고 쓰는 일은 이 바쁜 세상에 번거로워서 이제는 잊혀져 가는 일에 하나로 꼽게 될 것 같다.

전자메일로는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자주 이야기하고 수 없이 문답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참으로 편리하고 좋은 세상 같다. 그뿐만이 아니라 Facebook에 들으면 많은 사람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또 지금 있었던 일과 사진을 아는 이들에게 곧 보내어 알게 할 수도 있다. 그런대도 누가 그 만의 고운 필체로 정성스럽고 따듯하게 쓴 편지를 받게 되는 날은 온 종일 마음이 기쁘고 설렌다. 몇 해 전 가을에 아버지의 유품으로 한 상자의 오래된 편지를 받았다. 사십여 년 전 우리가 미국으로 이민을 왔을 때, 도착한 다음 날부터 내가 아버지께 보낸 편지를 모두 보관하여 두셔서 동생이 보낸 것이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내 파일 상자 안에는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딸 인숙에게”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낯익은 편지들과 어머니의 궁체로 쓰신 편지와 여러 해를 New York에 있으면서 보내준 내 딸 진영의 유려한 영문편지들, 그리고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서 온 여러 가지 사연들의 편지가 들어 있다.

은퇴를 하고 나서는 아무래도 시간이 많아져서 손자 손녀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게 하여서 원본과 함께 한글로 바꾸어 써서 아버지께 보내 드렸다. 아버지는 평생에 아는 이들에게서 받으신 것들과 본인이 당신의 스승에게 보낸 편지를 엮어서 “남기고 싶은 사연들”이란 책을 내셨다.

몇 해 전 7월 아주 오래 알고 지내는 친구 내외와 시애틀에 사는 친구 크리스틴의 초청을 받아서 오랜만에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크리스틴의 아들은 엄마의 옛 친구들 항공표를 사 보내 주었고 버클리에 사는 딸 헬렌은 우리들의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 시애틀 앞 바다에 있는 아름다운 섬에서 우리가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모텔을 예약해 주었다. 아주 오랜만에 배가 아프도록 웃으며 솜씨 좋은 친구가 만들어 주는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서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참으로 고마웠다는 편지를 썼다. 쉬운 영문으로 너의 엄마와 정말 좋은 시간을 가졌었다고 정성들여 써서 하나는 홍콩에 사는 제리 내외에게, 다른 하나는 헬렌과 그의 남편 루커스에게 보냈다. 며칠 지나서 시애틀 친구 크리스틴에게서 아이들이 내 편지를 정말 반갑게 읽었다고 전화가 왔다.

우리 교회의 길동무 모임은 이 달부터 “로마서” 공부를 시작했다. 사도 바울이 두기고를 시켜서 필기 한 이 편지를 겐그레아교회의 뵈뵈라는 여교우가 지참하고 로마의 교우들에게 가지고 간 것이다. 그녀가 소중하게 로마교회로 가지고 간 편지를 200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 우리가 공부하고 있다.

(김인숙)…

영화 ‘밍크코트’를 보고

(2013년 회지 “평화의울림“에 개제된 글입니다)

고선화고선화

‘밍크코트’ 이 영화는 ‘연명치료중단’이라는 무거운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 기독교 가족 내에서의 질투, 시기, 무관심 그리고 갈등과 그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이해 소통, 사랑, 그리고 화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좀더 시야를 넓혀서 보자면 가족관계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관계에서 발견되고 있는 문제들을 보게 한다.

현실의 어려운 문제와 직면했을 때 그리고 감추고 싶었던 사실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수치심, 당혹감과 분노 등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진면모가 드러났을 때, 그 무게를 잘 감당하고 밝혀진 비밀의 무거운 진실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에 무너질 수 밖에 없고, 분노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밍크코트’는 탐욕, 부와 부정적인 허영의 상징적인 의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 역시 이 상징적인 밍크코트를 입고 끊임없이 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왜곡시키면서 살고자 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보다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미움, 질투, 의심, 상처, 내가 저지른 일 등의 현실을 감추면서 살기 위하여 나에게도 밍크코트가 그리고 신앙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반추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의 스토리만 따라가다 보면 그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영화 속의 주인공들의 감정에 이입되어 가다 보면 마치 어떤 경우는 나의 감정을 대신 토해내는 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시작은 내내 무거움으로 전율하게 한다.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 나의 신앙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물론 영화가 끝까지 무겁지만은 않다. 따뜻함이 있는 영화이다.

극중에서 밍크코트는 가난한 현순, 넉넉하게 사는 언니 명순, 그리고 남동생의 처 경숙의 경제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소품이지만, 현순의 어머니는 부자 딸이 사준 밍크코트를 우유 배달을 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딸 현순에게 몰래 벗어 준다. 현순은 자신의 딸 수진이 돈이 필요하다고 하자 그 밍크코트를 팔아 돈을 마련해 준다. 어머니의 밍크코트는 잠시나마 가난한 딸에게 따뜻함을 전해 주고 또 그 딸의 딸에게 필요한 양식이 된다. 이처럼 밍크코트는 모녀 삼대를 이어 주는 따뜻한 사랑이 된다.

어머니의 연명치료중단이라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이 가족의 반목과 질시와 갈등이 극에 달한다. 허울만 좋게 밍크코트를 걸쳤을 뿐 그것으로 가려진 현실은 신앙으로도 극복 할 수 없는 갈등의 고조를 이룬다. 그러나 갈등이 고조를 이루고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이 가족은 입고 있던 밍크코트를 벗고 자신들이 숨겨 온 것들을 고백하게 된다.

어머니의 연명치료중단을 결정하는 문제를 놓고 동의와 반대의 입장의 씬을 보면 우리는 지극히 자기가 처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인 이유로 어머니의 존엄사를 원했던 가족에게 분노하고 막말로 저주까지 했던 현순도 결국 자신의 딸의 생명을 위해서는 어머니의 존엄사를 원하게 된다.. 이에 명순이 분노하고, 경숙 역시 자신의 친정 어머니였다면 연명치료 중단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부인하지 않게 한다.

가족이라는 것이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무거운 삶의 업보이며 때로는 그 어떤 풍파도 막아 줄 따듯한 울타리지만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 날 수 없는 핏줄로 견고하게 얽힌 덤블가시처럼 잔인한 감옥일 수 있음은 역설하고 있다.…

나의 신앙 고백 (채희탁)

(2013년 회지 “평화의울림“에 개제된 글입니다)

CoP 2013_Page_007_Image_0001나는 1939년 1월 7일 경상북도 문경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도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그 해에 서울로 이사를 왔으며 신암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1950년 6.25가 터졌는데 3개월간 북한 점령 하에 서울에서 살았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고향 문경-부산으로 피난 내려왔다. 휴
전과 더불어 서울로 와서 중학 3학년에 다녔다. 그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면서 안병무, 이영환, 함석헌 대 선배들을 뵐 기회를 가졌다.

군사 독재 치하에서는 시인 고은, 한빛교회 이해동 목사, 문익환 목사 등과 같이 어울리다 내 개인 기업체가 사찰을 받는 어려움도 겪었다. 개인 사업체의 어려움은 관료 정치, 부정부패와 제대로 타협치 못하는 내 성격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1991년 마지막 피난처가 된 미국으로 이민을 결행했다. 이민 수속에서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는데 부적격으로 판정날 순간에 기적 같이 VISA가 나왔다. 대신 내 이름의 성 표시가 Chae에서 Choe로 바뀌었다.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North Carolina에서 20년(그곳의 Bethel교회 김정일 목사는 잊을 수 없는 분이다)을 살았고, LA로 옮겨왔다. 그리고 평화의교회에서 15개월 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장장 73년이라는 세월 나는 교회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이력서에 종교는 항상 기독교라고 적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 기독교인인가? 구원을 받았는가? 이런 생각으로 나를 돌아보게 된 것은 박신화 목사가 리더가 되어 보그의 <내가 만난 하나님>이란 책을 중심으로 그룹 토론을 시작하고부터였다.

나는 여태까지 구원, 천당/지옥 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교회에 출석하며 설교를 듣고 때로는 감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60년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나에게 당부하신 “착하게 살아라, 또 성경을 읽어라”는 유언을 지키기 위하여 성서 신•구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 한 자 한 구절 한 구절 써서 장장 20여 권의 노트를 채웠다. 그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단지 내가 죽기 전에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는 하나님을 만났는가?’라는 질문에 노출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역사 속의 예수는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73년 교회 생활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믿음이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보다 더 중한 것은 사랑이라”하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지금 믿음이 필요함을 안다.

그래서 이제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을 주소서. 그 믿음은 산을 옮겨 바다를 메울 수 있다 했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에게 평화를 주소서. 그리하면 나의 마음의 하나님 사랑이 더욱 영역을 확고하게 넓혀 나의 마음속에 자리할 것을 믿습니다. 아멘.

(채희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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