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 자신을 벗어나다
욥은 잘못한게 없는데 하나님의 처사가 가혹하다며 항변하고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문제가 있다고 충고하는게 욥기의 구조입니다. 세상에 죄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따진다든가 죄없는 욥에게 가혹한 고통을 주는 하나님의 폭력성을 지적하면 욥기가 깔아놓은 ‘밑밥’만 보는 겁니다. 욥과 세 친구의 소득없는 공방이 오가던 중 욥은 타자에게 눈을 돌리며, 사회구조적 모순을 발견합니다. 그런 점에서 욥에게 가해지던 가혹한 고통들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욥이 겪어야 할 불편함 같은 것들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에만 갇혀있는 삶은 견딜 수 없이 불편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힘에 의해 발생하는 지구촌의 수많은 비극을 보며 불편해야 합니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현대인들이 타인의 고통도 미디어를 통해서 비디오 게임을 하듯이 소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을 미디어를 통해 보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사라진다는 말이지요. 아름다운 자연, 화목하고 풍요한 가정, 어린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 집에서 키우는 반려 동물들의 재롱 그런 것들만 보고 있으면 행복합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죄는 아니지요. 그런데 거기만 갇혀 있으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들을 타인의 고통의 자리로 초대해 그곳에서 깊은 교제를 나누시기 원합니다.
성경 본문: 욥기 24: 1-10
어찌하여 전능하신 분께서는, 심판하실 때를 정하여 두지 않으셨을까? 어찌하여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받을 날을 정하지 않으셨을까?
경계선까지 옮기고 남의 가축을 빼앗아 제 우리에 집어 넣는 사람도 있고,
고아의 나귀를 강제로 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부가 빚을 갚을 때까지, 과부의 소를 끌어가는 사람도 있구나.
가난한 사람들이 권리를 빼앗기는가 하면, 흙에 묻혀 사는 가련한 사람들이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가서 숨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들나귀처럼 메마른 곳으로 가서 일거리를 찾고 먹거리를 얻으려고 하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먹일 것을 찾을 곳은 빈 들뿐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남의 밭에서 이삭이나 줍고, 악한 자의 포도밭에서 남은 것이나 긁어 모은다.
잠자리에서도 덮을 것이 없으며, 추위를 막아 줄 이불 조각 하나도 없다.
산에서 쏟아지는 소낙비에 젖어도, 비를 피할 곳이라고는 바위 밑밖에 없다.
아버지 없는 어린 아이를 노예로 빼앗아 가는 자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이 빚을 못 갚는다고 자식을 빼앗아 가는 자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입지도 못한 채로 헐벗고 다녀야 한다. 곡식단을 지고 나르지만, 굶주림에 허덕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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