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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의 순간

결단의 순간

요나서 3:1-5, 10; 마가복음 1:14-20

하나님이 평화의 교회를 지난 40년간 축복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또한 복음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교회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임무에 다시 헌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려운 세상입니다. 복음을 전파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과 체제와 국가들이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평화의교회 여러분이 다음 10년의 목회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점검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원의 역사에는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 때 새로운 리더들을 준비하는 결단의 순간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순간에 맞닥뜨리면 그 사람의 가치관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과 어긋자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선택들을 사람의 성격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개별적인 선택의 총합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더 어려운 결단도 있습니다.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다수의 가치관 가운데 한가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도전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순간 속에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고 하나의 개인 및 단체 차원에서 하나의 방향을 정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통해 사람의 성격이 형성되어 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결단의 순간들은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던 것을 드러내고,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한 것들을 발견해나갑니다. 이러한 순간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쫓을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상에 대해 말을 할 뿐이었던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뼈아픈 과정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지도자들에게 일어난 과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고 있던 우르라는 대도시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유목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결단의 순간에 맞닥뜨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가족들에게 설명을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큰 확신을 가지고 가족을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 결단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보디바의 몸종으로 일을 시작하고 주인의 신뢰를 받아 가사를 다스리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디바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유혹을 거부하자 아내는 요셉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하고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결단은 훗날 애굽 이민과 출애굽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불타는 나무 앞에서 결단의 순간을 맞이한 모세는 어땠나요? 그는 망설이며 목자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파라오에 맞서 수만명의 노예들을 해방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모세의 결단의 순간은 새로운 나라를 일구어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결단의 순간 중 가장 극적인 예입니다. 그는 세례 받은 후 광야로 나가서 40일 동안 시험받으셨습니다. 이 결단의 순간을 만든 이는 바로 사탄입니다. 예수가 사탄을 만나고 확고한 선택을 내린 후에야 사탄이 그를 떠났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사역을 시작하고 세계를 영원히 바꾼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각각 결단의 순간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처음 결단한 이는 시몬과 형제 야고보였습니다. 그 후 같은 호숫가에서 그물을 고치고 있는 이들을 찾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부르자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들의 결단은 오늘날도 계속되는 역사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근대사도 결단의 순간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공립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매년 2월에 흑인 커뮤니티가 미국의 역사에 끼친 영향을 기념하고 배웁니다.

흑인 가사노동자였던 로자 팍스씨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는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이것은 1955년 12월 1일 알라바마 주 몽고메리 시에서 일어났습니다. 팍스씨는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팍스씨는 유권자 등록을 시도했지만 차별적인 법 때문에 하지 못했고 흑인들이 버스를 탈 때 앞에서 요금만 내고 승차는 뒷문으로 해서 뒤쪽에 앉아야 하는 모욕을 오랫동안 봐왔습니다. 어떤 때는 앞에서 요금만 받고 승객이 뒷문으로 승차하지도 않았는데 출발해버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흑인들에 대한 이러한 차별은 팍스씨의 결단의 순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승차 거부 후 382일의 버스 보이콧을 통해 도시 버스 시스템의 인종 분리 시스템이 철폐되었습니다. 팍스씨는 민권 운동의 어머니로 알려져있지만 팍스씨는 자신의 믿음과 기독교인으로써의 신념 그리고 교회 회중이 결단의 순간에 용기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팍스씨의 결단은 전국적인 민권 운동에 불을 질렀고 미국 사회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오늘 읽은 구약 성경 구절에서는 요나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의심을 가진자들도 사용하셔서 역사하십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려고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이야기에는 반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합니다. 아마 결론은 결단의 순간에 올바르게 응답하지 않으면 결단의 순간이 계속 찾아온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작은 비전과 작은 책임으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비전과 좁은 생각을 하면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갑자기 이 삶을 바꾸어놓고 안락한 삶에서 벗어나도록 결단의 순간들을 주셨습니다. 이 순간들은 요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수 있게 합니다. 요나의 모든 가치관은 결단의 순간에 의해 도전받았습니다. 그는 두가지 가치관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농촌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하나님은 농촌을 선호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이러한 경향을 대변합니다. 생명은 자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에덴 동상) 그리고 도시는 악이 결집하는 곳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많은 선지자들이 도시의 악에 대해 경고하고 본인들은 자연으로 되돌아가 영성과 기도에 몰두하지 않았습니까? 니느웨는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일부도 아니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가장 큰 수도 중 하나로 메소포타미아 북동쪽(현 이라크) 티그리스 강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보호하는 부족의 신인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이 앗수르 민족에 대해 걱정하고 계신가? 왜 그들을 걱정해야 하는가?

요나의 하나님은 작은 하나님이었고 그의 비전은 제한되어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이런 일에 관여하기에는 너무 차갑고 두꺼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가지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도망갔습니다. 요나의 생각에 하나님의 영토에서 벗어나면 결단의 순간을 외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고대 세계의 외곽 지역으로 알려진 타르시스 행 배를 탔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당시 가장 먼 곳으로 알려진 곳으로 가는 배표를 샀습니다. 하지만 그는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아서 시험을 받고 있으며 그를 내던지면 풍랑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뱃사람들은 그를 살리고자 계속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를 내던졌고 바다는 잠잠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희생양을 바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이것 또한 그들에게는 결단의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요나는 큰 고기의 뱃속에서 3일 낮과 3일 밤을 지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땅에 내뱉도록 고기에게 명령합니다. 그 후 니느웨로 다시 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지냈는지는 모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였고 니느웨 사람들은 예상과 달리 회개하고 금식하며 헌 옷을 입었습니다. 왕까지 로브를 던지고 잿더미 위에 앉아서 금식했습니다. 요나는 이러한 반응을 예상했을까요? 왕은 심지어 모든 사람들이 금식하며 회개하도록 왕령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회개를 보시고 니느웨에 가져오기로 했던 재난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왕은 자신의 책임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습니다. 요나만 빼고 모두가 회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에 분노했습니다. 요나는 참 안 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말씀 선포를 축복하셔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가져오는 도구로 요나를 사용하셨는데 요나는 오히려 짜증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이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 당시에 개그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분명 어떤 연예인은 요나를 소재 삼아 오랫동안 청중을 웃겼을 것입니다. 그 광경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깁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항상 죄인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으며 죄인의 영혼 속에는 회개와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절) 요나는 그러한 영혼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결단을 올바르게 내리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각자의 결단의 순간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채점을 하실까요? 다윗왕도 뛰어난 능력과 인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벳세바를 원하고 그녀와 간음 하는 순간 결단의 순간에 실패했습니다. 한번 유혹에 빠진 후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개인 생활은 어떻습니까? 가족 생활, 비즈니스 생활은 어떻습니까? 결단의 순간들은 일부가 거짓인 증언에 서명을 하는 행위, 악성 루머를 흘리는 행위, 집에 전화를 걸어 업무 때문에 늦게 귀가한다는 거짓말을 하는 등의 순간에 찾아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에서 구체적인 순간을 찾아볼 수 있겠죠. 요나처럼 우리는 그러한 결단의 순간에서 도망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순간들은 테레비젼 재방송처럼 다시금 우리를 찾아옵니다. 계속 결단의 순간은 찾아오고, 그 광경은 보기 좋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들도 결단의 순간이 있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목사들은 결단의 순간에 크게 실패한 교회를 한번정도는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교회들은 중요한 이슈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옵니다. 로자 팍스씨가 결단을 내릴 때 알라바마의 교회들도 이 이슈에 접했습니다. 당시 알라바마 주요 도시들의 도심지 백인 교회들 중에서 목사가 인종 차별 철폐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목사는 회중에 의해 핍박받고 곧 다른 목사로 교체되었습니다. 이들 교회들은 결단을 실패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유태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남자나 여자든지 모두 하나님에게는 같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문화와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기본적인 가르침인 이웃 사랑과 약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 할 때 가장 올바른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바로 이 시즌이 복음을 필요한 이들에게 전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이유로 핍박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너무 큰 책임을 맡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어루만져주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좋은 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몸이 아픈 이들에게도 치유의 손길을 뻗어야 하지만 영혼이 아픈 이들에게도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용서, 더 많은 선지자적 증인입니다.

평화의 교회가 이러한 결단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교회는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이제 각자의 생활 속에서의 결단의 순간을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의 성적표는 무엇을 보여주게 될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생활에서 벗어나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어부들을 부르셨을 때 처럼 오늘날 나의 생활에서 벗어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그냥 생활을 하고 싶을수도 있습니다. 그저 생존하는 것. 그저 다음 세대가 조금 더 살기 편하게 해주는 것일수 있습니다. 결단의 순간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들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켜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정의가 승리하며 하나님의 평화가, 하나님의 샬롬이 모두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각자와 교회 회중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을 전하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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