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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Archives: 자유게시판(공개) (page 18)

적을 만드는 사회 – 김기대 목사 칼럼

 http://gobalnewsla.com/xe/index.php?document_srl=9496&mid=column

 

일본에는 부라쿠(部落)이라 불리는 공동체가 있다. 아시아의 가장 선진국임을 자처하는 일본이지만 아직도 4,000여개 부라쿠에 3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천민으로 지칭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법적으로 신분제는 폐지되었고 차별도 없다고는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부라쿠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을 사람이 아닌 사람(非人, 히닝)으로 부르는 것이 차별의 증거다. 

 부라쿠 연구가들은 이 촌락이 중세의 신분제 사회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천황을 사람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격상시키기 위해 짝패로서 사람 아닌 사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부라쿠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사람 아닌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을 보면 그것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에도 여전히 그 수법이 사용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좋은 정치란 상대방보다 더 나은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경쟁적 우위를 차지해야 하는 것인데 미국이나 한국의 정치에서는 정책적 우위를 상실한 정치 집단이 상대방을 끊임없이 매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 받으려 든다.  

 한국의 NLL 논쟁도 그렇다. 휴전선과 달리 일방적으로 결정된 애매 모호한 구분선이다. 이것에 대한 정직한 토론이 있어야 한반도에 평화도 찾아 올 터인데 내세울 정책이 없는 정부 여당은 궁지에 몰릴 때마다 이 문제를 거론한다. 

 정치적 반대파들을 산 정상을 향해 다른 길을 선택한 등산객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낭떠러지에 밀어 떨어뜨리려는 대상으로 생각하며 정치를 하니 신분유지를 위해 부라쿠를 만들었던 중세의 일본 왕족들과 뭐 그리 다르겠는가? 그래서 국민은 항상 괴롭고 불안하다.

 독일에서는 기독교 민주당의 메르켈 총리가 3번 연임에 성공했다. 독일 언론은 “권력을 과시하지 않지만, 힘을 가진 정책”, “잘난 척하지 않고,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으며,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 인간적인 매력” 등으로 메르켈을 추켜 세우고 있다. 

 메르켈은 중도 보수정당인 기민당 소속이지만 진보 정당의 전유물 같은 원전 주제를 선점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독일내 17개의 원전을 2022년까지 폐기할 것을 선언했던 것이다. 

 원전이나 방사능 문제만 거론하면 상대방을 괴담 진원지로 몰아가는 한국 보수 정당이 배워야 할 부분이다. 좌우, 또는 적과 나의 피아 개념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의 문제를 메르켈은 정확히 짚어냈기에 유능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굳혀 나가고 있다. 

 메르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도 유명하다. 루터교 목사의 딸이기도 한 메르켈은 대중연설에서도 성서의 인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의 정치적 결정에는 성서의 가르침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메르켈의 경우를 보면서 적 만들기를 즐겨하는 우리의 여 대통령의 이념적 기초는 무엇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혹시 유신? 

 

 

이번 주일 CicLAvia 행사 관계로 다운타운 일부 교통 통제가 있습니다

이번 10월 6일 주일에 CicLAvia 행사가 있습니다. Alvarado 동쪽부터 다운타운 일대에 일부 교통 통제가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주최측 웹사이트와 아래 지도를 참고하세요. 이런 행사 좋은 취지인데 참가하려고 해도 딱 교회 예배 시간과 오후 신도회 등 활동과 겹쳐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나치면 끝나고 철수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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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시론

[LA기윤실 ‘광야의 소리’] 인증샷 해프닝 [LA중앙일보]
김기대 목사/평화의교회

발행: 09/24/13 미주판 26면 기사입력: 09/23/13 15:54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988537

아는 분 하나가 동료와 산행 중에 한국의 민감한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슬로건 하나를 들고 소위 인증샷을 찍었다. 요즘 유행처럼 자신의 SNS에 올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난데없이 산행 동료들이 그 사진의 삭제를 요구하더란다. 모든 사람의 정치적 지향은 다르기에 그 슬로건이 불편할 수 있지만 산행단체의 단체명이 사진에 포함된 것도 아니고 다른 일행들도 포함되지 않은 독사진이기에 사진의 주인공은 완강히 삭제를 거부했지만 그 사진을 찍어 준 동료 한 사람이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다고 사정해 결국 지우고야 말았다. 이 분은 지나가는 백인 등산객에게 부탁해서 보란듯이 같은 사진을 찍어 자신의 SNS에 올렸다. 그제야 동료 등산객들이 아무 말도 못했단다.

이 이야기는 슬프다. 자유로운 미국에 살면서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표현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 그것이 가져오지도 않을 파장을 두려워하는 이 난센스의 기원은 도대체 무엇일까. 구호의 내용도 모르면서 등산 중에도 자기 입장 표현을 하는 행위 자체에 칭찬을 보내주는 백인 등산객 앞에 부끄러움은 없었을지에 대한 생각이 들면서 나이 든 세대의 정체 모를 두려움에 슬펐다. 이곳에서 자란 젊은 세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이해를 못 한다. “뭐가 두려웠던 거죠?”라고 되묻는다. 나도 대답을 찾지 못했으니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슬프고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늘의 교회 현실과 겹쳐져 다가왔다. 오늘날 교회는 민감한 사안에 침묵하도록 교인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들을 젊은이들은 이해 못 할 시선으로 바라본다. 교회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모든 교회들이 젊은이들의 교회 이탈을 걱정하면서 이런저런 시도들을 해보지만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은 돌아올 줄 모른다. 민감한 정치 사안에 거침없이 입장을 표명하는 가톨릭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인기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런 부분은 배우려고 하지 않고 침묵만을 강요한다.

어거스틴은 “희망은 분노와 용기를 가지고 있다. 분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용기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분노와 용기를 공포로 다스리는 정치에는 희망이 없다.

하물며 그것을 묵인하는 교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Deprecated) 평화의교회 웹사이트에 글 올리는 방법 동영상 설명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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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서신

P1180297소설가 김인숙의 단편 <숨은 샘>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대웅전 앞에는 동백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아직 이른 봄이어서 꽃이 만개하지는 않았다. 무성한 가지마다 미끈하게 윤기나는 초록 잎들이 촘촘히 달라붙어 있는데, 그 푸른 잎들 사이에 봉우리를 터뜨린 꽃이 겨우 몇 송이 보였다. 꽃들은 전부 대웅전 쪽을 향해서만 피어 있었다. 마치 가장 먼저 핀 꽃이 가장 먼저 불전을 행해 얼굴을 들이민 것처럼. 꽃이 들여다보고 있는 대웅전 안을, 나 역시 밖에서 선 채로 들여다보았다.“

작가에게는 불상이 있는 대웅전을 향해 피어있는 꽃들이 무척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대웅전을 향해 핀 꽃의 사연은 무엇일까요? 영원과 초월을 향한 동백나무의 염원 때문에 꽃이 대웅전을 향해 피었을까요? 대웅전의 자비가 꽃의 방향을 끌어들였을까요? 두 개 모두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초월과 영원을 향하고 있다면 우리 인생은 항상 만개한 꽃과 같을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그분이 바라는 방향으로 늘 초대할 것입니다. 그분을 향한 마음과 그분의 끌어당김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미지 출처: http://dongnae.tistory.com/589…

살인의 추억

b0025419_4843f805f23678/31/2013 중앙일보에 실린 김기대 목사 칼럼입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설국열차’로 세계적 감독으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2003년 작품이다. 이 영화를 통해 봉준호는 명감독의 대열에 올랐고 이후 ‘괴물’ ‘마더’를 연속으로 히트시켰다. ‘살인의 추억’은 1986년 전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화성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10여명 이상의 여성들이 강간 살해 당했지만 결국 범인은 잡히지 못한 채 공소시효를 넘겨버리고 말았다. 범인이 잡히지는 않는 영화의 결말,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 때 많은 사람들이 실패할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봉감독은 500만 이상을 동원한 재미있는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는 우리에게 범인에게만 연쇄 살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고 되묻고 있는 듯하다. 젊은 여성들이 계속해서 죽어가는데 권력은 매월 한 번씩 철저하게 소등하는 등화관제 훈련을 어김없이 실시했다. 국가주의자들은 국가의 안보가 한 사람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지 않냐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등화관제는 어차피 국가의 안위가 아니라 백성들을 끊임없이 겁박하는 권력유지를 위한 퍼포먼스였을 뿐이다. 촛불 하나 허락하지 않던 그 어두운 밤에 꽃다운 한 명이 죽었다. 지역 치안을 더욱 강화해야 할 경찰병력은 민주화 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짓밟는 데 동원되었고 그 날도 한명이 죽어나갔다.

영화 제목은 왜 ‘살인의 추억’인가? 추억이란 것은 아련하면서도 여전히 살아서 우리 삶을 구성하는 기억행위다. 그 살인사건들을 만들어낸 사회적 조건들은 과연 극복되었을까 아니면 추억속에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을까를 질문으로 던지는 영화다.

지금 고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에 ‘살인의 추억’을 다시 보았다. 안보를 무기로 국민들을 겁박하는 일이나 백성들의 요구를 무시하는 권력자들의 오만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의 독재자들이 저질렀던 사건들이 추억으로 다가온다. 정치적 반대자들이 대한 초고속 사형 집행, 장준하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의문사, 광주학살 사건 등은 누구도 내가 범인이라고 나선 사람이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화성연쇄살인 사건처럼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세대가 교체될수록 미제 사건들이 추억조차 되지 못하고 잊혀져 가는 현상에 자신을 얻은 것일까? 그들은 갑자기 독재의 추억을 되살리고 있다.

이것은 아니다. 살인의 추억을 되살리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그 조건을 만들었던 사회 현상들을 추억의 창고속에서 꺼내 살려내는 정치는 나쁜 정치다. 나쁜 정치는 결말이 좋지 않다고 나는 확신하기에 고국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가 싫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들도 나도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주연의 영화가 5년동안 관객들의 인기를 얻으며 종영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재를 추억해서는 안된다. 대통령을 향해 쏟아지는 진상규명의 소리들을 진솔하게 들어야 한다. 독재의 추억이 잠시 흥행에 성공할 수는 있겠으나 그 시절을 견뎌냈던 사람들에게는 저항의 추억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독재의 향수에 빠져 있는 이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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