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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회의 몰락

평양교회의 몰락

(2015년 평화의교회 40주년 기념회지에 개제된 교인 기고문입니다)

문영조 장로

빨간 벽돌로 아름답게 지어진 평양의 교회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대동강변 늘어진 버드나무로 반쯤 가린 산정현 교회의 위용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주일 아침마다 뎅그렁! 뎅그렁! 울리던 그 종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스치는데, 아침 안개가 햇살에 먹혀 버리듯 그림자나 발자국도 없이 그렇게도 허무하게 사라진단 말인가?

소련의 모스크바에도 금빛으로 치장한 둥근 지붕의 교회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예루살렘에도 통곡의 벽이 버티고 있어 그 위용을 뽐내고 있건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 우던 평양과 그 많고 많던 교회들은 깨끗이 사라졌다. 그 이름만 들어도 온 천하를 호령하듯 위엄을 떨치던 교회들, 장대현 교회, 산정현교회 등 소위 삼현 교회들도 그 모든 기적과 미담들과 더불어 뜬 구름처럼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 곳은 일제 말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북쪽의 의인으로 불리던 조만식 장로가 섬기던 믿음의 제단이 있던 곳이다. 그 그루터기만 조금 남아 있어도 아시아의 옛 성지로 온 세계에 자랑 할 수도 있으련만…… 모든 것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흩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득한 하늘의 뜻을 어찌 짐작이나 하리오.

이름있는 선배나 학자들을 찾아 그 이유를 물어도 글쎄…. 하고 고개를 갸웃둥 하며 알 수 없다는 대답이다. 그러니 어찌하랴 이미 내 나이 고령에 어디가서 또 묻고 다니기만 할까.

외로운 평신도는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캄캄한 밤에 손을 더듬듯이 직접 나서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밖에 없다.

첫째는 다툼이다.

잘 나가던 산정현 교회의 분쟁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상처였다. 교회 문제가 아니요 의와 불의를 가리자는 싸움이 아니고 감정이 얽히고 설킨 시정 잡배들의 막장 비극이다. 10년을 넘게 싸우다가 결국 두 개로 나뉘고 그 여파가 타 지방 교회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며 퍼져 나갔다. J.C Smith가 1961년 7월에 발표한 연구 논문은 모든것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장로교가 세계에서 가장 분열이 심하고 그 끝이 안 보이는 분쟁 때문에 세계의 교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경이로운 집단” 이라고 했다.

둘째는 아메바 신앙이다.

예수 천당의 단순 신앙은 여러가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교회의 가르침이 실생활과 연결되지 못했다. 새벽기도와 철야기도가 일상 생활로 선하게 발전되지 못하고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녹아 들지 못하게 되었다. 고상한 가치관이 정립 될 수 없는 성경만의 해석은 과장과 오류로 인한 시험에 빠질 경우가 허다할 수 밖에 없었다.

1910년 세계 선교협의회가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렸다. 그 곳에서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 다루어지고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내놓게 된다. 신학의 빈곤, 철학의 부재, 성서 하나에만 의존하는 교육, 맹목적 암송, 죄와 구속을 강조하는 웅변식 설교, 천편일륜의 주입식 교육들이 그 문제로 대두 되었다. 학문과 문학, 예술이 결여된 성서해석에는 결정적 오류가 따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정교 분리주의다.

1974년 5월1일 열린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은 1일 오후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 등 이날 아침의 조찬기도회에 참석했던 8명의 외국 인사와 박현숙 준비위원장 등 국내 인사 9명을 청와대에서 접견, 차를 들며 환담한 후 이들과 기념 촬영.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종교행사처럼 깨끗하고 기분좋은 행사는 없다”고 말하고 “그 이유는 그 행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개인의 이해관계나 세속적인 정치 같은 것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경향신문 1974년 5월 2일자, 종교행사처럼 깨끗한 건 없어)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4년 5월1일 열린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은 1일 오후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 등 이날 아침의 조찬기도회에 참석했던 8명의 외국 인사와 박현숙 준비위원장 등 국내 인사 9명을 청와대에서 접견, 차를 들며 환담한 후 이들과 기념 촬영.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종교행사처럼 깨끗하고 기분좋은 행사는 없다”고 말하고 “그 이유는 그 행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개인의 이해관계나 세속적인 정치 같은 것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경향신문 1974년 5월 2일자, 종교행사처럼 깨끗한 건 없어)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제의 박해 아래 어쩔 수 없었던 미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의 정교분리로 교회들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고 90%의 교회들이 신사 참배에 나서면서 그것을 변명하기 위하여 거짓 신학까지 만들어야 하는 굴욕의 세월을 보내었다. 정치를 외면한 종교는 배란이 아니 된 계란과 같이 순간의 배고픔을 채워 줄 뿐이지 생명력이 사라져 산 신앙을 기대 할 수가 없다. 결국 이 나쁜 폐습이 1970년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공화당 정권이 박정희의 유신 전초전으로 삼선개헌을 시도 하려고 하자 NCC는 단연코 반대 입장을 표했다 그 반면 NAE (양심 자유 선언을 위한 기독교 성직자 일동)은 정교 분리를 표방하고, 개헌 문제는 종교와 무관하며 그것은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라고 선언하였다. 박 대통령의 용단을 환영하고 동시에 강력한 지도체제의 확립을 요구 하였다. 예언자적 위치에서 조국을 선도하여야 마땅할 그들이 손 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수치를 범한 것이다. 그 손은 안수하는 그리고 축도하는 손이다. 하늘까지 우롱하면 어쩌려나.

넷째는 불의와 부패다.

1936년 마산 문창교회와 김해읍교회에 스캔들이 일어났다. 목회자들의 불륜이었다. 평양에서는 총대들을 대거 파견하였다. 목사 본인들은 자기들의 허물을 숨기고 변명에 급급했다. 또 자기들도 북부 출신임을 강조하고 이 분류를 지역 감정으로 몰아갔다. 총대들은 이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숫자로 밀어 부쳐 불의한 목사편을 들어 주었으니 교인들의 실망과 낙담은 말이 아니었다. 서북 평양의 힘으로 막 자라나고 있던 남쪽의 교회들을 눌러 버린 것이다. 숫자의 오만이요 타락인 것이다. 30여년이 지나고 나서 초동교회 조향록 목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1971년 3월 2일자 크리스쳔 신문에 실린 그의 기고문이다. “숫자의 횡포는 한국 장로교 총회의 서북 세력이 주도했다. 나는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던 서북 땅이 해방되는 그날 왜 소련군의 침공을 받아야 하였으며,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 갔어야 함을 생각 할 때마다 이전(1936) 그 일을 아울러 생각해 본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대동강 성지다. 남들에게는 통곡의 벽이니 베드로 성당이니 남아 있건만 벽돌 한 장도 아니 남은 대동강변은 한가한 낙엽만 딩굴고 있다. 하늘의 사랑은 무한하지만 그 심판의 엄격함도 회개 없는 자에게는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동양의 성지 새 예루살렘, 평양의 그 고운 뒷모습이 멀리 사라져 간다. 훗날 우리의 속담에라도 그 흔적을 남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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