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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Archives: 평화서당 (page 3)

아주 가벼운 신학 이야기: 현대 신학 어디까지 왔나?

– Bible Green Class의 로마서 , Bible Red Class의 갈라디아서 공부를 보고

(2013년 회지 “평화의울림“에 개제된 글입니다)

김기대

 <근대(현대)란 무엇인가?>

근대의 시작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선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쉽게 말해서 신앙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데카르트의 선언은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세계관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이 선언이 운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시민들은 황제를 폐위하고 이성의 즉위식을 올렸고 많은 성직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성의 시대는 의학과 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이성의 시대에 신학은 잠시 위기를 맞았지만 성서 비평학, 성서 고고학과 같은 이성적 분야를 발전시키면서 지위를 유지합니다. 이로써 종교는 이성 신봉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소멸되지 않고 이성의 시대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성의 시대가 되면 합리적 존재인 인간이 항상 옳은 판단만을 해서 종교의 시대인 중세보다 좋은 시대가 될 것 같았지만 종교의 배타성 못지 않게 이성도 전횡을 휘둘렀습니다. 두 번에 걸친 전쟁과 인간의 욕망은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합리적인 이념체계인 사회주의도 결국은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의 위기는 철학적으로는 이성의 위기와 맥을 같이 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후기근대)의 사회>

이성의 한계에 고민하던 유럽은 1960년대 변화를 시도합니다. 이른바 68세대라고 하는 새로운 문화의 세대가 사회를 바꾸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68세대는 “금지란 단어 이외에 모든 것을 금지한다”는 유명한 슬로건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모든 것은 허용되었고 오직 “이것을 하면 안되!”라는 금지라는 단어만 금지한다는 뜻입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68세대는 다양한 문화를 창출해 내었습니다. 중세의 종교이건, 근대의 이성이건 어떤 것도 독점적이고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개인의 선택은 무한정 허용되었습니다. 상상력이 나래를 펴면서 영화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철학적으로 사유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 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종교적인 것도 아니고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자유롭게 살아가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 되었습니다. 이성의 독선을 넘어 모든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경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은 늘 유한합니다. 무한한 자유라는 것은 무한 경쟁을 가져왔고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낳았습니다. 사회주의의 퇴조로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가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듯이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보다 더 추하게 종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퇴조가 이성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면 자본주의의 퇴조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무한 자유의 한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앞에서 당황합니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가들이 종교의 시대나 이성의 시대를 온 몸으로 견디어 내면서 여성해방을 이루어 내었지만 새롭게 만난 현실이 자신들이 믿어왔던 것과 다르게 나타났을 때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유럽에 무슬림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무슬림 여성들과 조우한 유럽 여성들은 처음에는 무슬림 여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때가 되면 그들도 히잡을 벗고 사회의 당당한 주체로서 서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히잡을 쓰고, 자발적으로 남성에 종속된 여성성에 머물기를 원하는 낯선 이들 앞에서 유럽은 믿어왔던 것의 흔들림을 경험합니다. 이런 경우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장벽에 부딪힙니다.…

[평화서당] 바울의 정치신학 1장: 로마서의 수신자

타우베스는 로마서의 도입부와 후반부를 분해해서 다른 편지들과 다른 점을 집중 분석한다.

  1. 예수가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고린도서와는 다르게 강조된다. -> 이것은 후반부 반전 밑밥인듯.. 타우베스도 로마의 카이사르를 언급만 하며 분위기만 띄움(…)
  2. 바울의 사도 자격은 당시 전반적으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에서는 기존의 교회 체계와 그 사도들을 “사람에게서 받은 사도”라고 거의 공격조로 언급하면서 대신 자신은 예수와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사도직이라고 자기 변호를 한다. 그렇지만 로마서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 중 로마 교회는 자신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쪽에 더 많이 관여한 다른 사도들의 눈치를 본 듯) 대신 평소와는 달리 훨씬 길게 더 예수의 계보와 신성에 대해 기술 한 후 자신의 사도직은 한마디로 짧게 예수의 후광 뒤에 숨어서 마무리한다.
  3. 예수에 대한 설명도 다르다. 갈라디아서는 예수의 구원 사역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지만, 로마서는 예언자들과 성서(구약) 그리고 다윗, 이렇게 세가지 핵심 키워드를 언급하고 있다. 예레미야서의 문체를 흉내낸 것은 보너스.. 뭉뚱그리자면 갈라디아서는 (전통을 거의 배제한) “신약적인” 관점, 로마서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이 밑밥도 더 이상 설명을 안 한다…)
  4. P.44 에 “소위 순방 여행이라는 픽션”이라는 너무 눈에 띄는 표현이 두번 나오는데 번역이 덜 된 듯. 자세한 것은 나중에 원문을 볼 필요가 있다. (원문의 표현이 애초에 모호한데다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대충 넘겼을 가능성도 있음)
  5. 상기 1번에 나온 예수의 신성과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언급이 담긴 편지를 로마의 교회에 보냈다는 것의 상징성. 당시 로마에도 편지 검열관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반란 시도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편지를 열어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정기적으로 이런저런 종교모임이나 사교모임에 가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거나 (완전 열심히 일하는군?). 일반적으로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낭독하게 된다. 그런데 그 편지에서 직설적으로 자신들의 신이 세상의 왕이니 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은 카이저와 로마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해석을 바우어가 이미 했고 타우베스는 그에 대해 동의한다며 언급을 한다.
  6. 1장의 파트B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헌금이 다뤄진다. 타우베스는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아스포라 유대교 공동체와 예루살렘의 유대교 공동체를 이해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여러가지 역사적 사례를 동원해 이를 설명한다. 그리고 1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대교의 여러가지 종교 구조들 – 지리적 단위로 존재하는 종교 공동체(번역본에는 러시아 지부, 폴란드 지부 등으로 나옴), 유대인 중앙위원회 등 -의 오늘날 특성이 종교기관의 특성 상 바울 활동 당시에도 여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7. 이 부분에 들어서면서 타우베스는 이따금 짜증을 내는데, 정황으로 봐서 이 학회 발표 이전에 타우베스는 당대의 신학자들과 여러가지 토론을 이미 했고 토론의 결과 신학 또는 초대 교회사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본문에서: “이 사실[고대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세보메노이들의 당대 영향력]에 대해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대가리 머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정작 초기 교회의 사회문화적 하부 토대가 되는 유대교와 유대교 종교 기관의 특성에 대해 대충 알거나, 연구하기 편한 지역만 중심으로 연구를 하거나, 그냥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한심 당황했을 것으로 보인다.

[평화서당] 바울의 정치신학 영어 번역본 및 독어 원문

책을 읽다가 또 번역이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1부 44쪽에 “뭉크(다른 저자 이름)처럼 그렇게 문학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봤습니다.” 라는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게 이상한 이유는 바로 앞 부분에서 뭉크를 얘기하면서 마치 뭉크가 바울이 세계 끝까지 가서 민족들을 모으려고 했다는 부분에 대해 과대 해석을 했다는 뉘앙스로 쓰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문단에서 “뭉크처럼 원문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겠지만”라고 쓰는게 더 자연스럽게 연결 됩니다.

갑자기 의심이 들었습니다.  영어는 “그대로”와 “문학적으로”가 literally 와 litera(…? 이건 단어가 뭐가 될까요?)인 서로 비슷한 두 단어가 있지만, 온라인 독어 사전을 검색해보니 “그대로”는 wörtlich, “문학적으로”는 뭔지 모르겠지만 어쩃든 어미가 literatur로 시작하는 단어.. 이 두 단어가 생긴게 많이 달라서 혼동의 여지가 없습니다. 혹시 역자가 독어가 아니라 영문 번역본을 재번역하면서 literally 를 “문학적”으로 잘못 해석한것은 아닌가?

영어 번역본을 찾아보았습니다. 구글 북스에 스캔되어 있고 OCR 처리까지 되어있어 잘 검색되더군요.

The Political Theology of Paul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You don’t have to see this as literalistically as he does, but he did see something.

literalistically 라는 표현은 처음 봅니다.. 여기서부턴 영문 역자도 마구마구 의심되기 시작했습니다.

독어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구글북스 독어본에는 저작권 문제로 열람이 안 되고 제한적 검색 결과 표시만 되도록 되어있어서 확인이 어려웠으나, scribd 에 전문 스캔본이 다운로드가 가능한 형태로 있더구요

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Man braucht es nicht so literalistisch zu verstehenwie er, aber etwas hat er gesehen.

사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단어에 gg 쳤습니다.. 저거 번역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따라가기 힘든 책이니까 대신 애꿎은 역자를 도마에 올리고 싶으신 분은 상기 두개 원문 및 번역본을 참고삼아 즐거운 메타 비판의 세계로 떠나시면 되겠습니다..…

[평화서당] 성서와 대안좌파 1장: 새로운 세속주의

평화의교회에서는 격주 독서모임 “평화서당”을 통해 함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읽는 문헌은 로랜드 보어의 “성서와 대안좌파” 입니다. 둘째주는 제가 1장 후반부를 발제하게 되어 아직 참여하지 않은 교인분들의 관심을 유발하기 위해 발제문을 올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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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45-61p 의 내용을 정리하고 질문을 몇가지 던져봅니다.

제일 먼저 드는 의구심은 세속좌파, 종교좌파, 구 세속좌파, 후기세속좌파, 그리고 저자가 제안하는 wordly left (대안좌파) 등의 분류가 실체를 가지는 분류냐는 것입니다. 마치 이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서로 연합을 이루거나 분파를 해서 경쟁하거나등의 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1장 전반부의 내용인데, 일부 학계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표현은 아닌지, 혹시 저자만 쓰는 표현인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잘 못 보는 표현들입니다. 세상의 운동을 아주 크게 분할 해 놓으니 멋은 있는데, 실제로 세력을 이루지 않은 부류들을 카테고리화 해놓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장 후반부를 읽어나가다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레고성경이야기 (The Brick Testament) 라는 웃긴 웹사이트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 웹사이트는 자칭 (우스개로?) 목사라고 하는 스미스라는 개인에 의해 운영되는데, 성경의 여러 잘 알려진 이야기들을 가끔은 비꼬아서, 가끔은 적혀있는 그대로 레고 조각을 이용해서 연출을 하는데, 연출 수위가 많이 높습니다. 아래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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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서 봐야 하는게 이거 아무 생각없이 돌리다가 엉뚱한 장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순식간에 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 의하면 스미스는 무신론자라고 하는데, 레고이야기의 목적은 성경이 대부분의 기독교 외부 사람들 (그리고 내부 교인들도 포함해서)이 상상하듯이 고상한 이야기만 하거나 권력 체제를 유지하는 말만 있는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웹사이트로부터 출발해서 우파의 도구로서 인식되어 있는 성서를 해체하고, 성서가 해방적인 방향으로도, 그리고 체제유지의 방향으로도 해석 될 수 있다는 점을 논변합니다. 우파가 성경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변론하듯이 좌파 또한 성서를 포기하지 않고 해석 투쟁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결론나지 않는 의문이 나오는데요, 일반적으로 문서에 대해서는 그 문서에 “원래의 의도”가 존재하고, 문서를 가지고 그 의도와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남용”(abuse)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저자는 성경의 경우 그것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는 그 자체로 가치관적인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는 원래의 의도가 없거나 서로 상반되는 여러가지 의도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라고 말하는데, 이 점에 대해 더 이상 논지를 펼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론 이것을 전제로 하고 계속 주장을 펼쳐나갈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간략하게 전제를 주장하는 것이 충분한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3장에서는 같은 사건에 대해 헤게모니적인 읽기, 그리고 전복적인 읽기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는데 계속 가치관적인 평가가 전제로 깔려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자는 이어서 좌파적인 전통에서 종교좌파들의 역할과 좌파적인 성경해석들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훑어봅니다. 이 부분은 잘 정리가 되어있고, 제가 느끼기에 새로운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미국 주류 진보 운동에서 종교계는 하나의 부문로 자리잡은지 오래고, 공산주의 계열부터 환경운동에 이르기까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습니다.…

갑이 되어 버린 교회- 중앙일보 시론

[LA기윤실 ‘광야의 소리’] ‘갑’이 되어 버린 교회 [LA중앙일보]
김기대 목사/평화의 교회
발행: 06/25/13 미주판 30면 기사입력: 06/24/13 16:36

최근 한국 사회는 갑을 논쟁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 자본과 권력을 소유한 이른바 ‘갑’들에 대한 ‘을’들의 작은 저항이 SNS 등을 통해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그동안 수면 밑에 있던 가진 자들의 횡포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갑의 횡포 중에는 대기업들의 골목 상권 침투도 한 몫 한다.

교회의 역할은 을들을 위로하며 갑의 횡포에 맞서야 하는 것일 터인데 교회가 ‘을’들의 시름을 무능한 것이라고 설교하고 모두 축복받아서 갑이 되라고 선포하는 바람에 바알의 제단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교회는 꿋꿋이 ‘갑=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최근 미주 한인 교계에서 이슈가 된 두 명의 목사가 교회를 옮긴 것도 교회가 갑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중형교회 목사가 초대형교회로 옮겨가고, 또 어떤 이는 잠적, 개척과 통합이라는 전광석화 처신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류의 소식을 접하고 나는 놀라지 않는 편이다. 교회가 갑의 횡포에 맛들인지 오래되었는데 교회의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가 갑을 지향하는 풍토에서 초대형 갑으로 말을 갈아탄 그들만을 탓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이들의 분노 속에는 이들의 성장이 자신들에게 미칠 피해에 대한 걱정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내가 화나는 것은 스타 마케팅에 의존하는 그 교회들의 태도이다. 얼마나 교회에 자신이 없으면 스타에 의존하겠는가. 그 외형이 모래성 같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애잔한 생각도 든다.

나는 진심으로 새롭게 교회를 옮긴 이들이 목회를 잘해서 교회를 더욱 부흥시키기를 바란다. 새신자가 아니라 주변 교회 교인들이 그 교회로 옮겨 가기를 바란다. 이 말은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이다. 그래야 작은 교회든 중형교회든 갑의 위치에 있었던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더 이상 보여줄 치부가 없었던 것처럼 여겨졌던 한국 교회가 더 떨어질 나락이 남아 있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도약을 꿈꿀 수 있다. 정말로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좁은 문으로 가는 진실한 남은 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 더 마스터> –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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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감독도 모르는 영화 속 종교이야기”라는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http://www.christianherald.com/pdf/pdf_files/20130502.pdf

배우 탐 크루즈의 이혼 배경으로 거론되었던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교는 인간의 영혼을 과학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 종교다. 창시자 론 허바드(Ron Hubbard)는 인간의 악한 심성을 ‘테탄’이라는 에너지를 이용해 제거한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헐리웃 배우들이 심취해 있다. 독일 벨지움 등의 유럽국가는 몇해전 사이언톨로지를 사회에 해악을 미치는 것으로 규정해 포교를 금지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2012년) 사이언 톨로지의 창시자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다.
2차대전 참전의 후유증으로 폐인처럼 살아가는 프레디는 술에 취한채 우연히 호화유람선에 올라타게 된다. 배까지 오르게 된 지난 밤의 기억은 술 때문에 가물하지만 아침 침대에서 자고 있는 자신을 보고 놀란다. 선상에서 결혼식 파티를 여는 사람들은 그를 불청객으로 다루지 않고 친절하게 대했던 것이다. 프레디는 세상에서 모두 멀리하던 자신을 환대하는 이 집단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프레디는 아무 생각없이 감정이 내키는 대로 살았지만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에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교주(마스터)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마스터는 코즈라는 시간 여행을 소개하는데 일종의 최면술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마스터의 친절함에 감탄한 프레디는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열혈신도가 되어 반대자들에게 폭력을 행하거나 마스터를 구속하러 온 경찰 공권력에도 대항한다. 하지만 광신도들이 늘 그렇듯이 여기서도 한계를 발견한 프레디는 마스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집단을 떠나게 된다.
영화 엔딩 부분에서 프레디는 모래사장에서 자신이 만든 나신의 여성 모래 조각상 옆에 평화로이 누워 있다. 이 모래 조각상은 그가 쌓고자 했던 모래위의 지은 집일 수도 있고 놓쳐 버린 첫 사랑의 추억일 수도 있다. 파도에 의해 허물어질 조각상은 사랑과 종교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것이 마치 모래 조각상처럼 짓고 무너지고 하는 과정에서 성숙해 진다는 것을 프레디는 배우게 될 것이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첫 사랑의 실패가 그의 삶을 무너뜨리고, 전쟁과 술이 그를 파괴하고, 요상한 신흥교주가 그를 주관하려 했지만 이 없어질 모래조각을 만들면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가는 연습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성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간의 이성은 과대 평가되어 왔다. 이성의 결과물인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행복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두번의 세계 대전의 비극도 이성의 결과물이다. 종교가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시절에 사람들은 이성의 상실에 두려워 했고 영화 속 마스터는 비이성적인 장치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성을 과신하게 만든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기계교라는 것에 심취해 자신의 아들까지 죽였던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모두 테크놀로지가 인생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스터는 이성을 믿으라고 주장하지만 이성이 얼마나 비 이성적인 것인가를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유람선에 오른 프레디에게 감정의 지배를 받지 말고 이성의 지배를 받으라고 이야기 하지만 프레디가 마스터를 신뢰하게 된 것은 감정때문이었다.
기독교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성도 감정도 부분적인 역할을 하겠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믿음이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각하고 실천하는 능력이다.…

도서관에 새 책이 들어 왔습니다

가상칠언 (김남준)
다섯가지 사과의 언어 (게리 채프먼)
저 낮은 곳을 향하여(한완상)
나에 대하여 (김유정)
프라하의 묘지1,2 (움베르토 에코)
오두막 (윌리암 폴 영)
다시 프로테스탄트 (양희송)

3분(토드부포)
아프니까 청춘이다 (김난도)

홍까오량 가족 (모옌)

호생관 최북 (임영태)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역사 (남경태)
건투를 빈다 (김어준)
신선이 되고 싶은 화가 장승업 (조정육)
마음을 맑게 하는 부처님 말씀 (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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