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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Archives: 자유게시판(공개) (page 15)

영화 ‘밍크코트’를 보고

(2013년 회지 “평화의울림“에 개제된 글입니다)

고선화고선화

‘밍크코트’ 이 영화는 ‘연명치료중단’이라는 무거운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 기독교 가족 내에서의 질투, 시기, 무관심 그리고 갈등과 그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이해 소통, 사랑, 그리고 화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좀더 시야를 넓혀서 보자면 가족관계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관계에서 발견되고 있는 문제들을 보게 한다.

현실의 어려운 문제와 직면했을 때 그리고 감추고 싶었던 사실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수치심, 당혹감과 분노 등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진면모가 드러났을 때, 그 무게를 잘 감당하고 밝혀진 비밀의 무거운 진실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에 무너질 수 밖에 없고, 분노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밍크코트’는 탐욕, 부와 부정적인 허영의 상징적인 의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 역시 이 상징적인 밍크코트를 입고 끊임없이 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왜곡시키면서 살고자 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보다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미움, 질투, 의심, 상처, 내가 저지른 일 등의 현실을 감추면서 살기 위하여 나에게도 밍크코트가 그리고 신앙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반추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의 스토리만 따라가다 보면 그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영화 속의 주인공들의 감정에 이입되어 가다 보면 마치 어떤 경우는 나의 감정을 대신 토해내는 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시작은 내내 무거움으로 전율하게 한다.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 나의 신앙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물론 영화가 끝까지 무겁지만은 않다. 따뜻함이 있는 영화이다.

극중에서 밍크코트는 가난한 현순, 넉넉하게 사는 언니 명순, 그리고 남동생의 처 경숙의 경제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소품이지만, 현순의 어머니는 부자 딸이 사준 밍크코트를 우유 배달을 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딸 현순에게 몰래 벗어 준다. 현순은 자신의 딸 수진이 돈이 필요하다고 하자 그 밍크코트를 팔아 돈을 마련해 준다. 어머니의 밍크코트는 잠시나마 가난한 딸에게 따뜻함을 전해 주고 또 그 딸의 딸에게 필요한 양식이 된다. 이처럼 밍크코트는 모녀 삼대를 이어 주는 따뜻한 사랑이 된다.

어머니의 연명치료중단이라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이 가족의 반목과 질시와 갈등이 극에 달한다. 허울만 좋게 밍크코트를 걸쳤을 뿐 그것으로 가려진 현실은 신앙으로도 극복 할 수 없는 갈등의 고조를 이룬다. 그러나 갈등이 고조를 이루고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이 가족은 입고 있던 밍크코트를 벗고 자신들이 숨겨 온 것들을 고백하게 된다.

어머니의 연명치료중단을 결정하는 문제를 놓고 동의와 반대의 입장의 씬을 보면 우리는 지극히 자기가 처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인 이유로 어머니의 존엄사를 원했던 가족에게 분노하고 막말로 저주까지 했던 현순도 결국 자신의 딸의 생명을 위해서는 어머니의 존엄사를 원하게 된다.. 이에 명순이 분노하고, 경숙 역시 자신의 친정 어머니였다면 연명치료 중단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부인하지 않게 한다.

가족이라는 것이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무거운 삶의 업보이며 때로는 그 어떤 풍파도 막아 줄 따듯한 울타리지만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 날 수 없는 핏줄로 견고하게 얽힌 덤블가시처럼 잔인한 감옥일 수 있음은 역설하고 있다.…

나의 신앙 고백 (채희탁)

(2013년 회지 “평화의울림“에 개제된 글입니다)

CoP 2013_Page_007_Image_0001나는 1939년 1월 7일 경상북도 문경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도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그 해에 서울로 이사를 왔으며 신암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1950년 6.25가 터졌는데 3개월간 북한 점령 하에 서울에서 살았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고향 문경-부산으로 피난 내려왔다. 휴
전과 더불어 서울로 와서 중학 3학년에 다녔다. 그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면서 안병무, 이영환, 함석헌 대 선배들을 뵐 기회를 가졌다.

군사 독재 치하에서는 시인 고은, 한빛교회 이해동 목사, 문익환 목사 등과 같이 어울리다 내 개인 기업체가 사찰을 받는 어려움도 겪었다. 개인 사업체의 어려움은 관료 정치, 부정부패와 제대로 타협치 못하는 내 성격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1991년 마지막 피난처가 된 미국으로 이민을 결행했다. 이민 수속에서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는데 부적격으로 판정날 순간에 기적 같이 VISA가 나왔다. 대신 내 이름의 성 표시가 Chae에서 Choe로 바뀌었다.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North Carolina에서 20년(그곳의 Bethel교회 김정일 목사는 잊을 수 없는 분이다)을 살았고, LA로 옮겨왔다. 그리고 평화의교회에서 15개월 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장장 73년이라는 세월 나는 교회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이력서에 종교는 항상 기독교라고 적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 기독교인인가? 구원을 받았는가? 이런 생각으로 나를 돌아보게 된 것은 박신화 목사가 리더가 되어 보그의 <내가 만난 하나님>이란 책을 중심으로 그룹 토론을 시작하고부터였다.

나는 여태까지 구원, 천당/지옥 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교회에 출석하며 설교를 듣고 때로는 감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60년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나에게 당부하신 “착하게 살아라, 또 성경을 읽어라”는 유언을 지키기 위하여 성서 신•구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 한 자 한 구절 한 구절 써서 장장 20여 권의 노트를 채웠다. 그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단지 내가 죽기 전에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는 하나님을 만났는가?’라는 질문에 노출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역사 속의 예수는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73년 교회 생활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믿음이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보다 더 중한 것은 사랑이라”하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지금 믿음이 필요함을 안다.

그래서 이제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을 주소서. 그 믿음은 산을 옮겨 바다를 메울 수 있다 했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에게 평화를 주소서. 그리하면 나의 마음의 하나님 사랑이 더욱 영역을 확고하게 넓혀 나의 마음속에 자리할 것을 믿습니다. 아멘.

(채희탁)…

김교신과 유달영, 제자에서 사돈으로: 김교신 선생 첫째며느리 김(유)인숙 장로 인터뷰

4월 25일은 김교신 선생 서거 70주기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로, 그리고 우찌무라 간조의 사상을 재해석한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한국 교회사의 큰 획을 그었던 김교신 선생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된 후 석방되었으나 해방 100일 전에 함흥에서 별세한다.

서울에선 작년 11월 김교신 선생 서거 70주년을 맞아 이만열, 양현혜 교수 등이 중심이 되어 ‘김교신 기념사업회’가 출범하기도 했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4890…

3월 29일 위원회별 모임 기록

3월 29일 있었던 위원회별 모임 기록 내용을 다음과 같이 웹사이트에 올립니다. 각 위원회에서는 회의 결과에 따른 후속 작업을 추진해주십시오.

2015년 3월 29일 12시-1시

도서학술위원회

참석: 양재역목사내외, 신영균, 신숙희, 채희탁,  채혜자, 송병우목사, 송종현, 장기병, 재니퍼강, 윤제니 (11명)

  1. 도서관리체계마련
    1. 양재영, 장기병 (대여, 반납등)
    2. 신간도서코너  마련
  2. 40주년기념음악회:
    1. 6월예정. 도서학술위원회에서자원 (아래내용)
    2. 출연진선정, 조정
    3. 스케줄(연습및음악회)
  3. 새위원합류환영: 송병우목사님내외

예배위원회

  1. 예배 15분전기도로준비하자. 복장에신경써서예배참여
  2. 문영미권사주도로, 김인숙장로와함께준비
  3. 성가대찬양팀을위해기도와격려로후원
  4. 예배꽃을기존방식대로하다가차후변경논의

 

전도선교위원회

참석: 8+3=11

  1. 실행위원선별해서한달에한번씩모임을가지고전반적인상황과활동을수시점검요함
    실행위원자원자: 이내운, 김용호, 유철균, 박신화
  2. 전도가무엇이며, 선교가무엇인지
    1. 정확한의미와구분 -> 박신화목사준비
    2. 명확성재교육필요성(차기모임)
  3. 평화의교회의비전제시
    1. 교회웹사이트참조
    2. 성도교제를위한방법제시

i.      구역친목모임재개시

ii.      전도자료제시

  1. COWORK 프로그램지원(선교에속함)

i.      양재영목사초청하여필요한부분에대해듣자

ii.      교회웹사이트통해1차홍보

iii.      전단

  1. Home Less  mission
    1. 현재는일년에5번정도실시되고있음(5번째주일이있는월에)
    2. 지원할수있는방법모색

교육위원회

  • 주일학교규모가너무작다. 아이가있는 40대부모를더전도하자
  • 고주열목사가 대책연구

주성하 기자 "신은미씨 보도, 미친 마녀사냥": 탈북자 출신 동아 국제부 기자… "마녀 사냥 너무 심각했다"

신은미 교우 마녀사냥을 시작한게 동아일보에서 하는 종편 인데 동아일보 기자가 작심하고 바른 말을 했습니다. 참고 하시기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6575&PAGE_CD=N0001&CMPT_CD=M0016

주성하 기자 “신은미씨 보도, 미친 마녀사냥”
탈북자 출신 동아 국제부 기자… “마녀 사냥 너무 심각했다”

지난 22일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기자가 보수 언론의 재미동포 신은미씨에 대한 보도를 ‘마녀사냥’이라고 비판했다.

주 기자는 개인 블로그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에서 ‘신은미 콘서트와 2014년판 마녀사냥’이라는 글을 통해 신은미씨의 종북 콘서트 논란을 두고 ‘2014년 현대판 종북 마녀사냥의 대표적 사례’라고 비판했다.

주 기자는 “평양이란 한정된 지역과 북한 당국에 의해 지정된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쓰인 글임을 감안하고 읽으면 그다지 분노할 만큼 문제점을 많이 찾지는 못했다”며 “탈북자들의 수기도 그들이 살았던 환경을 감안하고 읽듯 이러 저런 글을 읽고 종합해봐야 북한이란 나라의 전체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분명히 문제 제기는 할 수 있는 상황임을 인정한다”면서도 ▲ 하지도 않은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찬양했다는 발언 ▲ 신은미가 통전부(통일전선부)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서 활동한다고 낙인 ▲ 개인사 캐내기 등이 “너무 심각했다”고 열거했다. 주 기자는 보수 인사들의 이와 같은 행태를 보며 “이건 정말 미친 마녀사냥”이라고 비판 했다.

주 기자는 탈북자의 신은미씨에 대한 ‘맞짱 토론’ 요구에 대해서도 비판 의견을 전했다. 탈북자 이순실씨는 황선 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의 “북에서는 세쌍둥이가 6㎏이 될 때까지 산원에서 돌보더라”는 발언을 두고 “나는 대합실에서 해산했는데 무슨 산원 같은 소리냐”고 비판한 바 있다.

주 기자는 “북한에선 산원에서 애를 낳는 선택된 소수도 있고, 대합실에서 해산하는 소수도 있다”면서도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를 거짓이라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며 토론이 이뤄진다면 “한쪽은 가장 안 좋은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쪽은 자기들이 봤던 북한의 단편적 이야기를 하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싸움이 될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주 기자는 또 “이 점이 대한민국을 며칠째 들었다 놨다 할 심각한 문제인가, 대한민국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무시할 수도 있는 별 것도 아닌 강연보다 수백 만 명이 보도록 몰아간 마녀 사냥이 더욱 문제가 있다고 본다”며 언론의 과장 보도를 문제 삼았다. 이어 그는 “비록 나는 프레임도 잡지 못하고, 조선 뒤따라간, 또 보수층 장사도 제대로 못해 3등으로 처진 신문의 기자이지만, 이런 식으로 얻은 1등은 부럽지 않다”고 밝혔다.

주성하 기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탈북자 출신으로, 2003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후 현재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직을 맡고 있다.…

교회는 언제쯤 너그러워질까?-신해철을 보내며

가수 신해철씨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뉴스M과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는데 지금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회수가 너무 많아 저도 조금 어리둥절 한데요.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니 기분은 좋네요. 교우들과 함께 나눕니다.

신해철의 쾌변 독설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소년은 막연히 신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선택과목으로 독일어를 택했고(19쪽), 대학은 철학과로 진학했다.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와 ‘성채’,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으면서 성장한 소년은 스물한 살 때인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연예인이 된다. 가수 생활을 하면서도 신부 서원으로 인한 결벽증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첫 성경험이 늦은 것”(18쪽)도 그 때문이었다.” 교회(성당)의 경직된 분위기가 싫어 가톨릭을 떠났지만 교적은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후벼 파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심성이 곱던 그가 어머니에게 참척(慘慽)의 슬픔을 남기고 먼저 갔다.

가수 신해철이 46세 젊은 나이에 이 세상과 이별했다. 위키 백과는 신해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신해철(1968년 5월 6일 ~ 2014년 10월 27일)은 대한민국의 가수 및 음악 프로듀서, 사회운동가이다. 대중에게는 1992년 결성된 록그룹 N.EX.T의 보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서태지와 함께 1990년대를 상징하는 뮤지션 중 하나이다.

나는 그의 노래에 대해서 잘 모른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재즈카페’는 들어보았는데 그것도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에서 자우림 밴드의 김윤아를 통해서였다. 다시 말해 나에게 그는 가수라기보다는 용감한 투사였다. 그래서 위키백과는 사회 운동가로 부른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안에 대해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언사를 일부에서는 ‘독설’이라고 했고 마니아층에서는 ‘마왕’으로 불렀다. 정치인들과 교수들이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적당히 몸을 사리다 들어가는 것을 못 참겠다는 듯이 그는 한쪽 진영에 서서 자기의 입장을 확실히 했다. 점잖은 체하는 분위기를 못 견뎌 하던 ‘정상인’이었다.

신해철은 음반 말고도 책을 남겼다.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가 인터뷰한 (부엔리브로, 2008년)은 신해철의 모든 것을 담았다. 인터뷰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지승호가 인터뷰할 정도로 신해철은 자기 세계가 확실한 가수였다. 책에서 신해철은 국가, 종교, 사회, 문화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특유의 독설로 풀어낸다. “오죽하면 개독교라고 욕을 먹겠는가”라며 “헌법대로라면 기독교도 모조리 감방에 보내야 한다. 협박공갈죄로”라고 기독교를 폄훼한다.

이어서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 시장 재직 시절 서울시 봉헌 발언이나 2007년 조승희씨의 버지니아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당시 주미대사인 이태식씨의 금식기도 제안을 강하게 비판한다. 굶으려면 혼자 굶으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조승희씨가 한국인이었다고 해서 미국 사회에 대한 굴욕적인 사과(동포들의 금식기도로 참회)를 제안한 이태식 대사의 발언이 언론에서 크게 비판받았었다.

또한 기독교가 자기 생활을 침해할 수 있기에 방어차원에서 기독교를 싫어한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경계하는 게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믿으면 상관이 없는데 저 사람들이 내 생활 안으로 파고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생활을 침략하고, 공격해 들어오니까 방어를 해야 되는 거죠.(중략).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손에 맥콜 음료수를 들고 있었어요. 그게 일화에서 나오는 거 아닙니까? 통일교 기업이고, 지나가던 한 여자가, 제가 보기에는 뭔가 광기가 들린 듯한 특유의 번쩍거리는 눈동자로 저를 보는데, 정말 무서웠는데요.…

금주의 설교 오디오 및 영상 지연

이번주도 설교 업로드가 지연 됩니다. 캠코더 설정을 좀 바꾸었더니 파일 사이즈가 8GB 메모리 카드를 초과해서 마지막 10분 정도가 캠코더 내장 메모리에 저장되네요. 다음주부터는 비디오 파일을 확인하고 설정을 바꾸던지 해서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곘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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