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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3월 11일 미국 본토에 최초의 한인교회인 ‘나성한인 감리교회’(현재의 LA연합감리교회)가 세워진지 2년 후인 1906년 5월 10일 에는 미국 본토에 세워진 세번째 한인 교회이며 미국내 최초의 한인 장로교회인 제퍼슨장로교회(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로스앤젤레스에 세워진다.
당시 한인들은 주로 1904년부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나 파인애플 농장에서 이탈하여 미국 본토로 유입된 사람들과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살고 있던 교포들이었으며, 특히 하와이로부터 이민온 사람들 중에는 고국에서부터 기독교를 믿던 사람들이 있었으나 로스엔젤레스에는 아직 교포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 없었다.
1906년초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방화중(고향은 평양이고 하와이를 거쳐서 미주로 건너왔다)전도사가 로스엔젤레스에 머물던중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t)목사가 그때 마침 안식년으로 귀국해 있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마포삼열 목사는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교포들을 위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장로교회를 세우기로 마음을 정한후 미 북장로교 나성노회(Presbytery of Los Angeles)에 뜻을 전달한다. 노회에서는 한인을 위한 교회 창립을 위해 프리챠드(Augustus B. Pritchard)목사로 하여금 교회를 조직하고 인도하도록 하였다.
방화중 전도사는 시내 벙커힐(Bunker Hill)에 사가를 얻어 프리챠드목사의 인도 하에1906년 5월 10일 18명의 교인들이 모여 창립 예배를 드리면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100년이 넘는 역사가 시작 된다.
그리고 창립후 32년이 지난 1938년 5월 4일에 현재 위치인 1374 W Jefferson Blvd. Los Angeles, CA 90007로 이전하게 된다.
창립후 4년 뒤 한국에서는 1910년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양국 합병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은 대한민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8월 22일에 체결되어 8월 29일로 공식 발표된다. 이로써 을사늑약 이후 실질적인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편입되어 암울한 일본 강점기가 시작된다.
한인 담임목사와 당회구성
미국에 한인을 위한 최초의 장로교회가 창립 되었으나 노회에서는 아직도 장로도 없이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인 장로교 미션(Korean Presbyterian Mission)으로 허락을 하여 모든 사무적 관할을 하게 되었다. 방화 중 전도사는 주일마다 설교를 담당하며 프리챠드목사를 도와 충실한 전도인의 역활을 하고 있었다. 교회는 미 북장로 산하의 지역노회에 속하고 프리챠드목사의 지도하에 운영되어 왔으나 제반 활동은 한국인 전도사들의 희생적인 인도로 이어져 나갔다.
1926년에는 프리챠드목사의 사회하에 노회대표가 참관하는 가운데 세명의 장로와 세명의 집사를 선출하여 당회를 구성 하였으나 교회를 전담할 한인목사를 구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하던 때에 1928년 로스엔젤레스의 Coliseum 에서 열린 세계 주일학교 대회(World Sunday School Convention)에서 한국교회의 대표단으로 입국한 20명중에는 4명의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이 대회의 환영준비위원으로 참석했던 교회의 임원들은 한국교회의 대표단으로 입국한 4명의 목사중에서 김중수목사를 교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중수목사는 1928년 11월 4일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이 교회의 한인 담임목사 시대가 아래와 같이 이어 진다.
- 1대 담임목사 김중수 1928.11.4~1936.8.1
- 2대 담임목사 김성락 1937.2.16~1958.5.31
- 3대 담임목사 권희상 1959.7.1~1967.12.1
- 임시 담임목사 김형일 1968.3.1~1969.5.31
- 4대 담임목사 백리언 1969.7.1~1972.6.18
- 5대 담임목사 우상범 1972.9.19~1985
4대 담임 백리언 목사
나성연합장로교회의 3대 담임목사인 권희상 목사의 시무기간 중에 장로들이 1967년 1월 16일 ‘목사 사면 권고안’을 제출 하면서 담임목사와 장로들간에 갈등이 표면화 되기 시작한다.
갈등이 본격화 되자 노회는 교회 분규 해결을 위해 노회는 ‘행정위원회’(Administrative Commission)를 구성하여 중재 하려 노력 했지만 결국 권희상 목사를 1967년 12월 1일 부로 해직하고 다음 해 2월 1일부로 당회를 해산 시킨다. 그리고 노회에서 5인, 교회측 장로 2인 추가된 총 7명으로 구성된 새 행정위원회를 구성한다.
교회의 운영를 맡게된7인 행정위원회는 김형일 목사를 임시 담임목사로 1968년 3월 1일부터 시무하도록 한다. 7인의 행정위원회가 교회를 운영 한 후 교회가 안정되어지자 새 당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1968년 5월 4일 7인의 장로 임직식을 가진다. 또한 안승화 장로를 위원장으로 한 청빙위원회를 구성하여 새 담임목사를 선정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
마침내 서울에 있는 연세대 교목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백리언 목사를 교섭하면서 백목사로부터 부임할 뜻이 있음을 전달 받는다. 백목사 위임투표를 위해 노회에서 나온 버레이목사의 사회로 1969년 2월 9일 공동의회를 소집 하였는데 투표결과 찬성 60표, 반대 10표, 기권1표, 무효1표로 위임목사 청빙건이 가결 되었고 청빙 가결된지 5개월이 지난 7월 1일부터 부임하게 되었다.
목회와 교육의 경험이 풍부한 백목사가 부임 하면서 교회는 모든 면에서 생동감 있고 희망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백목사는 우선 주일학교 교육을 강화 하기 의해 조직을 재정비 하면서 학생수가 매주 늘어났으며, 한국으로 부터 오는 이민자 수가 증가 하여 매 주일마다 새로온 교인의 소개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교인수 증가에 대비해서 교회 기구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0년도 부터는 12인의 장로 가 당회원으로 시무 하였다. 또한 교회 규칙(By-Law)을 수정하여 1970년 2월 15일 공동회의에서 새로운 규칙을 통과 시켰다. 이 규칙은 미 연합 장로교 헌장과 함께 교회 운영의 기본적 법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 1938년도에 입당하여 사용중인 건물이 증가하는 교인들을 수용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아서 ‘교회 확장 헌금’을 모으기로 하여 $9,000의 헌금 약속을 받고 교인들의 정성을 교회 증축에 집중 시켰다.
당회의 분규와 백목사의 사임
백리언목사가 부임한지 1년 7개월이 넘은 1971년 2월 22일 당회에서 다수의 결정에 따라 “이제부터는 장로가 대 예배시에 기도와 광고를 하기로 하고 3월 첫 주일부터 실행하기로 한다”고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목사는 이를 수용하고 더 이상의 충돌을 피했다.
그러던 중 그 해 6월 27일 백목사는 ‘교회 건물 확장 계획’이 부진한 가운데 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은 제의를 하였다. “교인의 증가로 예배 장소가 문제가 되니 지금의 사교실을 없애고 긴 의자를 비치하여 예배당으로 하고 사교관계의 모임은 주일 학교실을 쓰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로부터 3개월 후 9월 19일 당회안에 구성된 ‘교회확장연구위원회’(위원장 오영균 장로)는 건축법상의 문제를 이유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당회도 백목사의 제안을 부결시킨다.
당회의 부결에 실망한 백목사가 당회에 사표를 제출하자 장로들의 만류로 사표가 철회되지만 그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
이듬해 1972년 2월 5일에는 백목사가 제의한 ‘목사를 돕고 심방을 위한 부목사(임시)를 초빙 하는 일’이 예산상의 어려움 문제로 당회에서 부결된다. 이처럼 백목사가 소신을 가지고 목회하기 어려운 일들이 당회에서 일어나는 상황에서 3월 16일 ‘시무 사면서’를 당회에 제출했다. 이 소식이 바로 집사들에게 알려지면서 3월 18일 ‘집사회’는 이번 ‘시무 사면서’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의서를 회장 문영조, 서기 김희선 집사 이름으로 당회장에 제출한다.
“첫째, 당회는 백리언 목사의 사표에 관한 결정을 연기해 줄 것. 둘째, 사표수리 여부는 제직회나 공동의회에서 처리해 줄 것.”
이 같은 집사회의 결의서는 장로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고 4월1일 당회에서는 백목사의 사표를 반려하게 만든다. 사표가 반려되면서 백목사도 “더 열심히 교회를 위하여 일하겠다”고 장로들에게 전하며 교회의 어려움을 해소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장로들의 사표와 당회 불출석 등의 파행이 시작되고 각종 교회 행사가 분규 이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 같은 과정을 바라보던 백목사는 1972년 6월 18일 주일 아침예배를 마친후 임시당회를 소집하고 ‘시무 사면서’를 노회에 제출하였음을 통보한다.
백목사가 사표를 제출하고 교회를 떠나자 교인들은 불안해 했고, 사면서를 접수한 노회의 목회 인사 위원회 (Ministerial Relations Committee)는 긴급회의를 열고 교회문제를 파악 하기 위해 휴브러(Kenneth L. Hubler)목사를 노회를 대표해서 파견하여 6월 29일 장로들과 연석회의를 열었다. 사태의 내용을 파악한 휴브러목사는 이 문제를 공동회의를 통하여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당시 교인들은 이미 “장로들이 목사의 활동을 심하게 제약하였다”는 의견과 “백목사의 사임은 교회의 미래를 위해 잘 된 것이다” 라는 두가지 의견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드디어 노회의 주관으로 진행된 7월 16일 공동회의에서 홰니엘(Leon E. Fanniel)목사는 백목사의 사표수리를 표결에 붙여 47대 46표 1표차로 사표를 수리 하였고 이화목, 노서환, 홍순건, 오영균 네장로의 사표를 일괄 접수하여 표결에 부친 결과 70 대 22표로 네 장로의 사표가 수리 되었다.
분규의 해결과 새 당회 구성
주일 초청목사들 중 우상범목사는 교회의 분규를 해결해 보기로 자청했다. 그래서 우목사는 우선 자신이 임시 목사로 부임 할것과, 둘째로 당회에 남은 장로들의 사표를 책임지고 받아 내기로, 셋째로는 당회 해산후에 새 당회를 구성 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하였고 이 제안은 1972년 9월 19일 노회의 승인을 받게 된다.
노회의 결정에 따라 우목사는 임시 목사로 시무하게 되고 당회가 해산된 후 새 당회를 다시 세워야 했다. 그래서 1973년 1월 21일 노회의 모리슨 목사의 사회로 인사위원회 7인이 배석한 가운데 새 당회를 구성하기 위한 공동회의를 열었다. 장로 추천 위원으로는 7명이 선출되었는데 인사 추천 위원회가 11명의 장로 후보를 추천 하는 과정에서 이화목 장로는 후보들 중 문영조와 차경수 집사를 후보군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구 했지만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다. 이화목 장로는 마지막으로 문영조 집사만은 장로 후보에서 제외해 줄것을 재차 요청 했으나 이 또한 거절되고 다수의 투표 결과를 따르도록 하였다. 투표결과 김치은, 김희선, 로스 백, 문영조, 안정옥, 유진형, 이대수, 조규환, 조석현, 차경수, 최옥엽등 11명이 장로 후보로 선정 되었다. 2월 11일 장로 6인을 선출하기 위한 공동회의를 개최 하였다. 이날 173명의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3차 까지 가는 투표결과 김치은, 문영조, 안정옥, 이대수, 조규환, 차경수 6명이 장로로 선출 되었는데 1차 투표에서 김치은, 문영조, 이대수, 차경수 4명이 당선되자 이화목 장로가 일어나서 퇴장하고 이어서 20여명이 퇴장 하였다. 2월 25일 오전에 취임식을 하고 오후에는 당회장 그린리(Max E. Greenlee)목사의 사회로 새 당회 첫 모임을 가졌다. 이후 노회에서 새 당회장으로 베어드(John S. Baird)목사를 임명 하였으며 새 당회를 구성한 이후 교회는 화평을 되찾고 각 부서의 활동도 활발하게 회복 되어 갔다.
교인의 이탈
새 당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투표 결과에 불만을 가졌던 장로들과 교인들이 교회를 이탈하여 한달이 채 못되서 일부는 한인 남가주 교회(이화목, 박리근, 한소제, 오영균, 조명섭, 이향근, 김희선, 유진형, 유의영, 김세담)를, 그리고 또 다른 일부 교인들은 나성 영락교회(백보경, 조석현, 이광혁, 강윤만, 홍순건, 노서환)를 시작한다. 한편 1973년 4월 1일 공동회의에서 김치은 장로를 위원장으로 하고, 강영옥, 공성린, 이대수, 문영조, 정문섭, 명재휘, 김종근, 박종갑, 민원식 등 모두 10명으로 “목사 청빙 위원회”를 구성 하기로 가결 하였다.
이후 일년이 넘게 담임목사 청빙 문제를 토의 하던중 사임후 서울 종암교회에서 시무하던 백리언 목사가 미국에 다시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교회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한다. 마침내 백목사가 1974년 7월 1일 로스엔젤레스에 도착 하였고 당시 임시목사로 재직중인 우상범 목사는 7월 7일 설교를 부탁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담임목사 청빙위원회 내에서 현재 임시목사인 우목사가 위기의 교회를 안정시킨 공로가 있으니 담임목사로 적합하다는 의견과 백목사를 다시 담임으로 세우자는 의견이 대립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의견 대립으로 목사 청빙 문제가 지연되자 백리언목사는 1975년 1월 5일 첫 주일 오후 2시에 창립예배를 드린다고 통보해 온다. 당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교인들 중 약 10가정이 해람장로교회로 합류 하고 얼마 후 얼마 후 장로 2명과 집사2명이 추가로 해람장로교회로 합류한다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70년사’ 중에서>
당시 제퍼슨한인교회(현재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70년 초 한국으로부터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에 이 교회로 다양한 부류가 모여 들어왔고 서로간의 의견이 분분 했습니다. 게다가 이민초기의 고통이 교회내에서 발산 되면서 분규가 심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젊은 사람들(문영조, 이대수, 방미철, 김종근 외…)이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당회장이 없이 임시목사(우상범 목사)로 꾸려가던 상황에서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목사가 노회장을 하면서 노회법규상 미국 목사들이 부단히 드나들었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교회에서 분규로 싸우고있는 모양을 보고 당시 흑인차별은 물론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이 공개적으로 있을 시기에 거기다 싸움까지 하니까… 그분들도 귀찮아 해서, 당회를 주재하기 보다는, 연설로 우리 당회원들을 야단을 치고 민족적인 모멸감을 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로 생각 되서 감히 반론을 하지 못하고 듣기만 하다가, 그나마 미국서 공부하고 교육받은 한 두 사람이 논리적으로 대항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너무 심했다는 것을 인정 했습니다. 그러나 민족성에대한 열등감 때문에 자책감과 부끄러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한인들은 본국이나 미국이나 세계적으로 싸우는데 아주 길게 끝이없이 싸우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특히 장로교회들이 심했습니다.
“여기서 이래서는 안되겠다, 우리가 한민족의 주체성과 명회를 회복을 해야겠다고” 그래서 우리 끼리 서로 싸우지 않는 교회를 새로 만들어 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창립40주년 기념 대담 / 문영조장로 편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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