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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람장로교회 창립

1975년 1월 첫주일인 5일 오후 2시8가와 Crenshaw Blvd.가 만나는 사거리에 위치한 헝거리언 개혁교회 (Hungarian Reformed Church: 751 Crenshaw Blvd. LA, CA)에서 창립목사 백리언과 31명의 신도가 모여 해람장로교회 역사적인 첫 예배를 드린다.

박양원씨의 연주를 시작으로 백리언 목사는 시편 34편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으로 예배 선언을 하고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제목의 첫 설교를 한다.

교회 창립은 LA지역의 여러 교회들로부터 많은 관심속에 이루어졌으며 특히 백리언 목사가 4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창립 당시 국내외 정세

창립당시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가 끝난지 30년이 지난시점 이며, 한국전쟁 (1950.6.25~19537.27)이 발발하고 종전이 된지 22년이 지난 시점으로 당시 초대목사를 비롯한 장년층 신도들 대부분이 한국의 두 비극적인 시대를 겪으며 성장한 세대들이었다.

또 당시의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북측은 김일성공산 독재 체제하 있었으며, 남한은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1961.5.16~1979.10.26)가 3공화극 체제에서 1972년 10월 17일 헌법을 개정하여 유신독재(1972.10.17~1979.10.26) 로 전환 한다.

미국을 보면 1964년 가을 버클리 대학으로부터 시작된 미국 대학의 반전운동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0년 미국이 캄보디아 내전에 개입하면서 절정에 이르지만 1973년들어 베트남으로부터 미군이 철수하면서 시위도 잠잠해 졌다.

미국내에서는 1964년 7월2일 존슨 대통령은 공공장소, 고용, 선거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해람장로교회 창립당시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법으로 금지된지1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 흑인뿐만 아니라 한인들을 포함한 소수민족 이민자들 에게도 차별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1965년에는 미국 이민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개정된 이민법에 의해 유학생, 객원 간호사와 의사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 온 한인들이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고 이들이 1965년부터 1970년 사이의 한인 이민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후에 국제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함께 한국에 남은 가족을 초청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한인 이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창립목사 백리언

A22 백리언해람장로교회 창립목사로 모신 백리언목사의 호는 해람(海籃)으로 평안북도 의주출신으로 일찍 만주 봉천에 가서 살았다. 일본 동경 신학교에서 수학한후 일제 말엽에 다시 봉천에 돌아기서 봉천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2월 14일 목사 안수를 받고 봉천 서탑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해방후 귀국하여 전라남도 광주의 전방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연세대학교 교목으로 재직한다. 1956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석사(S.T.M.)학위를 받고 귀국 후에는 연동교회 목사를 역임(1962~1966)하고 1968년 3월부터 다시 연세대학교 교목실장으로 봉직하고있었다. 그러던중 미국에 있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로부터의 청빙을 수락 하면서 1969년 7월 1일부터 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하지만 서 오래된 교회 갈등으로 빚어진 시련끝에 3년이 채 안된 1972년 6월 18일 노회에 시무 사면서를 제출하고 그해 7월 4일 한국으로 돌아간다. 1974년 서울 종암교회에서 시무하던 백리언 목사는 다시 미국에 입국하여 7월 7일 나성한인영합장로교회 초청설교를 한후 1975년 1월 5일 자신의 호를 교회명으로 하여 해람장로교회 창립목사를 역임하게 된다.

나성연합장로교회에서 많은 싸움을 경험한 우리들은 싸우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목회자도 설교도 좀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좀더 이성적으로 서로 싸우지 않고 교회를 이끌어 가 보자는 분위기로 백리언 목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창립40주년 기념 대담 / 문영조장로 편 중에서 >

해람 장로 교회의 의미

해람은 바다해(海) 바구니람(籃)이 합쳐진 백리언 초대목사의 호이며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동일 단어를 사전상에서 찾아보면 동음이의어인 풀해(解) 닻줄람(纜)자가 합쳐저 ‘닻줄을 풀어 배를 출발시킨다’는 출범이라는다른 의미를 띈 한자조합의 보통명사가 나타난다.

그렇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에서의 요람은 흔들 요(搖),바구니 람(籃)을 사용 하였다면 이를 통해 대략 그 의미를 추측을 할 수 있다.

요람은 젖먹이 어린애를 잘 놀게 하거나 재우기 위하여, 위에 눕히거나 앉히어 놓고 흔들게 만든 바구니로 만든 물건으로 ‘포근하고 아늑한 보금자리’, ‘어떤 일의 발생지나 근원지’,’어떤 일이 발전하는 실마리’ 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해람(海籃)은 ‘바다를 품을 수 있는 큰 바구니’, ‘바다처럼 큰 근원지’, 등의 의미를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년전 백리언 목사의 자부인 백혜옥씨는 글을통해 해람이 교회명으로 채택되게 된 동기를 전해주고있다.

이렇게 명명된 ‘해람장로교회’는 의미에 대한 의문과 작명동기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안고 24년간을 유지하다가 1998년 9월 1일 제 3대 담임목사로 김기대목사가 부임한 직후인 1999년 1월 3일 현재의 이름인 ‘평화의교회’(Church of Peace)로 바뀐다.

창립당시, 제 곁에 누가 같이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버님께서는 “이제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다해 이 교회에 봉사 하고자 합니다. 선친께서, 네가 이 다음에 커서 큰 일을 하게 되면 이 이름을 쓰라. 하시며 해람(海籃)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는데, 교회 이름을 ‘해람 장로 교회’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모두들 “그렇게 하시지요” 하고 찬성 하였습니다.

<20주년기념지 ‘카이로스’ 백리언 목사의 자부 백혜옥 글중에서>

첫 당회 구성

창립예배를 드린 지 3개월이 지난 1975년 4월 9일 당회장 백리언 목사와 이대수, 문영조, 방미철, 김종근 네 장로로 첫 당회가 구성 되었다.

네 장로들은 모두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출신 이었다. 백리언 목사가 이 교회의4대 담임목사직을 사퇴하기 전후 이 교회 당회 의원들과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후 당회원 모두 담임목사를 사퇴에 이르게 한 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산 되었다. 그리고 새 당회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이때 새로 선츨된 장로는 김치은, 문영조, 안정옥, 이대수, 조규환, 차경수 6명이었다. 이중 문영조 장로, 이대수 장로, 당시 이교회에 함께 재직중이던 김종근 집사와 방미철 집사 총 4명이 이교회를 떠나 백리언 목사를 중심으로 해람장로교회 창립을 주도하게 되었다.

백리언목사의 교통사고와 장기입원

수많은 인근지역 교회, 그리고 창립당시 초기 교인들의 기대와 지대한 관심속에 속에 출발한 해람장로교회에 뜻밖의 불행한 시련을 맞게된다. 새 교회를 시작한지 불과 얼마되지 않은 1975년 6월 초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상에 누워 목회를 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창립 후 얼마 되지 않아 지도자를 설교단에서 볼 수 없는 초기 신도들, 그리고 당회장이 없이 당회를 이끌어야하는 젊은 4명의 장로들에게 첫걸음부터 재앙과 같은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창립 20주년 기념지 카이로스의 ‘단편회고’를 통해 “네 젊은 장로들은 마치 고아가된 심정”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해람장로교회 창립

Updated on 2015-09-12T17:18:03-07:00, by Yongho Kim 김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