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교회 40년사 | 발간사 | 이민 교회 |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 해람장로교회 | 이창식 목사 | 성장기 1980년대 | 교회의 변화 | 다시 시작 | 후기 | 부록 | 기고문
교인의 증가
1975년 31명이 모여 창립 예배를 시작으로 아직 자체 교회건물이 없이 두번의 이사를 하면서도 5년간 신도가 꾸준히 증가한다. 1980년에는 장년부 주일예배에 100명, 어린이에서 청년에 이르는 주일학교에는 50명 정도가 평균적으로 출석, 매 주일마다 총 150명 정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던 1986년 12월 말에는 장년 151명 주일학교 70명이 합처져 221명을 기록하면서 이후로 80년대 말까지 교인의 숫자가 평균 200명 이상으로 출석인원이 계속 증가 한다.
이 같이 꾸준한 성장의 원인은 첫째, 고국을 떠나서 이민생활 속에도 교회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모든 열정을 쏟아 교회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교인들의 노력을 들 수 있다.
둘째, 창립 이전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시절 겪었던 극심한 분규를 통해 어떤 일이 있어도 싸우지 않고 이성적이고 평화적으로 대화를 통해 교회를 이끌어 가자는 장로들의 의지가 있었을것이다.
셋째, 1976년 이래로 이창식 목사가 시무하면서 교회가 균열없이 안정된 목회를 유지 할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로 들 수 있다.
넷째로, 당시 한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이민자 숫자가 1970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해서 1980년대에 들어와 급속도로 증가한 배경을 들 수 있다. 실제로1965년이민법 개정전의 한국계 미국인 수는 대략 2만5천 명이었지만, 1970년에는 5만 명, 1980년에는 35만7천 명, 1990년에는 70만 명까지 급속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약 35만 명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한다
이창식 목사의 5•18 시국예배 참석
교회를 Faith Presbyterian Church로 이사하고 1년이 채 안된 1980년 5월 17일 자정 무렵 한국은 18일 오후 4시 쯤이었다. 이 시각 전남 광주에서는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 폭행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있었다.
미국 시간으로 5월 18일 오전 11시 이날도 여느때 주일과 다르지 않게 해람 장로 교회에서는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창식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예배의 설교제목은 ‘외국사람 처럼 살았습니다’였다. 이날 예배에는 장년 98명에 주일학교 52명을 합하여 150명이 참석했던 것으로 주보에 기록되어 있다.
돌아오는 5월 25일 이창식 목사는 11시 주일예배를 마치고 당일 오후 8시 윌셔연합감리교회에에서 개최된 ‘나라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했다. 이 예배는 한국에서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희생자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시국 기도모임 이었다.
이창식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예배에서 홍동근 목사의 기도에 이어 ‘공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라는 제목으로 조석환 목사의 설교가 이어졌다. 설교후 황갑주의 시낭독에 이어 석진영의 ‘위정자들을 위해’, 이응균 목사의 ‘학생들을 위해’, 이금식 목사의 ‘사망자를 위해’, 정원희 목사의 ‘투옥자를 위해’ 기도를 했으며 이창순 목사의 헌금기도와 김익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이날 헌금은 예배 비용을 제하고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 보내기로 하였다.
6월 15일 해람장로교회 주일 예배 시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중 계엄군의 발포와 무자비한 유혈진압으로 속출하는 사상자를 치료하고 있던 ‘광주 기독병원’에 보낼 특별헌금을 모금하였다. 이날 모금된 특별헌금의 총액은 $783으로 미국 장로교단을 통해 광주기독병원 으로 보내졌다. 이때는 해람교회가 미국장로교에 가입하기도 전이었지만 교인들의 의식 속에는 믿을만한 교단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2년 12월부터 1985년 2월까지 미국 체류(망명)생활을 하던 중 김대중 선생을 음으로 양으로 돕는 교인들이 많이 생겨났다.
진보 기독교 유명인사들의
신앙강좌 릴레이
80년대로 접어들면서 1981년 3월 15일 신학박사 김재준의 신앙강좌를 선두로 89년 10월 14일 안병무의 신학강좌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진보적인 기독교 신학을 대표하는 유명인사들의 신앙강좌가 해람장로교회 주최로 연속해서 개최되면서 신앙강좌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에 신앙강좌를 이끈 주역들은 장공 김재준을 비롯해서 대부분이 진보 기독교 진영의 저명인사들이였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 담임 이창식 목사가 소속된 ‘한국 기독교 장로회’(기장)측의 유명인사들로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존 보수기독교 신학의 체제순응적이고 교회내에만 안주하는 기존신학의 틀에 반론을 제기하고 교회와 사회의 부조리를 향해 양심의 소리를 내면서 독재와 부패에 맞서기 시작했다.
80년대 초반부터 이 같은 진보신학계의 저명인사들의 초청강연을 연속해서 개최하면서 해람장로교회 일부 신도들은 차츰 진보적인 신학과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되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는다. 그리고 이같은 변화를 시작으로 오늘날 평화의 교회가 보수일색의 미주 한인사회에서 진보의 목소리를 내는 몇 안되는 교회중 하나로 알려지게 된다.
1981년 3월15일 : 제1회 평신도를 위한 신학 공개 강좌 – 김재준
해람장로교회에서 주최한 ‘제1회 ‘평신도를 위한 신학 공개 강좌’는 는 윌셔연합감리교회(711 S. Plymouth Blvd, Losangeles, CA 90005)에서 1981년 3월 15일 주일 저녁 7시에 열렸다. 이창식 목사의 사회로 개회사에 이어 김재준이 1966년 지은 시에 훗날 이동훈이 곡을 부친 우리찬송가 261장 ‘교회의노래’(새찬송가 582장 ‘어둔밤 마음에 잠겨’)를 다같이 부른후 ‘구약성서의 예언사상’이라는 강연제목으로 강좌가 이루어졌다. 이 강연은 LA전지역의 목회자를 대상으로한 공개강좌로 100명에 가까운 목사들이 강좌를 들었다고 한다.
1982년 8월 22일: 안병욱 교수 초청 강연회 / 강연제목 : 생명의 완성
1983년 5월20일 ~ 22일 : 특별 사경회 – 조덕현 / 강연제목:신앙의 결단(20일), 에베소의 오순절(21일), 순례자의 신앙(22일)
1984년 3월25일 : 제 3회 평신도 신앙강좌 – 김동길 / 강연제목 : 사랑의 길
1984년 6월9일 : 제4회 신학 공개 강좌 – 서남동 / 강연제목 :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1985년 2월15일 ~17일 : 교회 창립 10주년 특별 사경회 – 이상현 / 강연제목 : 현대인과 신앙 (15일 오후 7:30), 십자가의 속죄(16일 오후 7:30), 내 양을 치라 (17일 오전 11:00),We are Korean-American(17일 오후 1:30), 순례자의 신앙(17일 오후 7:00)
1987 년 8월 21일 ~ 23일 : 교회 여름 수양회 – 김하태
1989 년 10월 14일 : 제3회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 – 안병무 / 친구여! 가자 십자가의 길을
신축 교회로 이전
1978년 9월 지난 1차 건축헌금은 목표액 $30,000을 초과하여 결산액이 $46,228이 조성 되었었다.
1979년 9월 2일 김종근장로를 위원장으로 하는 2차 건축 위원회를 구성 하였다. 백형설(서기), 이진수(회계), 문영조, 백학구
1980년 5월 에 1640 W. Cordova St. Los Angeles, CA 대지를 매입이 완료
1980년 9월 14일 부터 ‘교회건물 수리를 위한 2차 건축헌금’의 목표액을 $40,000 정하고 10월 5일까지 모금한 결과 $67,870로 초과 도달했다.
1980년 10월 19일 정용진 집사, 이진수 집사, 신기호 집사 3명의 건축위원 추가 임명
1981년 12월 27일 현재 본당 위치(1640 W. Cordova St. Los Angeles, CA)로 이전 대지는 10,000sqft이고 건물면적은 3,000sqft로 구입가는 $106,700이다.
1981년 1월 교회건물 내부 개장 및 수리를 하기위해 고암건설과 $72,500에 계약
1981년 3월 교회건물 내부 개장 및 수리를 위한 시청허가 요청
1981년 6월7일 오후1시 교회건물 상량예배 전교인 참석
1981년 9월 20일 교회건물 개축공사 완공을 앞두고 내부시설, 주차장 포장공사, 의자 및 비품 구입등의 비용을 위한 특별헌금을 모금하여 예산액 $20,000을 상회하는 $22,868을 모금.
1981년10월25일 여전도회 에서 의자 구입비용 헌금 모금 $4,000
1981년11월 15일 교회 개축공사 완료
1981년11월 29일 신축 교회당 입당예배
이날 입당예배는 대지를 구입한지 1년 6개월만에 감사주일을 맞아 이루어졌다. 이창식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오전 11시 입당예배 에서 이석재 장로의 기도와 이창식 목사의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라”라는 제목의 설교가 이어졌다. 신축건물 입당예배에는 장년부 예배에 178명, 어린이 주일학교 81명이 참석하여 총 259명이 예배를 드렸다.
신축 교회 입당 예배후 자체건물을 마련한 기쁨과 감사가 교인들에게 넘쳐나면서 교회에 예배 및 친교에 필요한 각종 집기 제단용 십자가, 촛대, 꽃병, 친교실 철제의자, 탁구대, 심지어 소화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인들의 기증이 이어졌다.
또한 불편한 세입자 신세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용할 공간이 마련되면서 11시 예배를 마치고 점심식사후 본예배와는 별도로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드릴 수 있었으며 부활절, 성탄절에도 주일예배와 별도로 ‘수난일 음악과 명상의 밤’, ’성탄축하 음악의 밤’, 등의 절기행사를 열 수 게 되었다.
1981년 12월 25일에는 문형여 선생 문병옥 권사의 금혼축하예배를 시작으로 1983년 8월 27일 구회영 장로 영결예배등 각종 경조사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1981년 12월 27일에는 1979년 9월 2일 위원장 김종근으로 하여 문영조, 백학구, 백형설, 신영한, 이진수, 신기호 위원으로 구성된 이래 그 임무를 다하여온 2차 건축위원회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기쁨 속에 해산하게 된다.
이어서 당일 2시에는 이창식 목사의 사회로 ‘교회봉헌예배’가 이어졌다. 교회 봉헌예배에서는 권희상 목사의 기도에 이어 손순열 목사의 “교회의 사명”이란 제목의 설교가 있었다. 이어서 건축위원장 김종근 장로는 건축보고를 한뒤 당회장에게 열쇠를 건넸다. 열쇠를 건네받은 당회장은 봉헌기도후 건축위원장 김종근 장로, 평신도 대표 김세진 집사, 고암건축 대표 안성주 사장에게 각각 감사패를 증정했다.
태평양 노회(PCUSA)가입위원회 조직
이창식 목사가 시무를 시작 한지8년이 지난 1984년 10월 28일 문영조 장로를 위원장으로 하여 김종근, 백학구, 정용진, 이진수, 신영한, 신영식을 위원으로 하는 7인의 태평양 노회(PCUSA)가입위원회가 조직 되었다. 1975년 창립당시 31명으로 첫 예배를 드린 이후 교인의 수는 꾸준히 증가 하였고 태평양 노회(PCUSA)가입위원회가 조직되기 직전에는 장년부의 주일예배에 160명, 그리고 어린이와 중고등부의 주일학교에 60명 모두 합쳐 평균 220명 정도의 인원이 신축 교회 건물을 주일마다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특히 1984년 4월 22일 부활절주일예배에는 장년 188명에 주일학교 98명이 합쳐져 286명이 출석 했으며, 1984년 11월 18일 추수감사절 예배에는 장년 174명에 주일학교 73명이 합쳐져 247명이 출석 했으며, 1984 년12월23일 성탄절에는 장년 172명에 주일학교 84명이 합쳐져 256명이 출석 했다고 당시 주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교회가 자체건물을 갖고 교인수가 증가하고 교회 재정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서 점차 분규가 발생될 요인 또한 증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교인들과 당회원들은 이에대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우선 노회에 가입하면 교회를 운영해갈 때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분쟁이 있을 경우 세세한 노회법에 의거하여 순조롭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또한 당회 혹은 목회자 교인간의 각종 분규등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경우 노회가 관여해 중재를 하게 된다.
태평양 노회(PCUSA)가입
태평양 노회(PCUSA) 가입 위원회가 조직(1984년 10월28일)된지 일년이 지난 1985년 11월 10일 예배직후 이어서 전주부터 공지된 ‘미국장로교회 태평양노회 가입’을 안건으로 공동회의가 소집되었다. 세례교인 이상이면 모두 참석할 수 있는 공동회의에서 각교인에게 회칙(By-Law)이 배부되었고 다수의 찬성으로 태평양노회 가입건이 가결 되었다. 따라서 향후 노회의 가입 허락이 나오는 대로 태평양노회 가입 절차를 밟게 되었다.
태평양노회 가입이 결정 됨에따라 1986년 2월2일 주일11시에 노회 가입예배가 진행 되었다. 노회가입 헌법서약을 한 후에는 곧바로 장로장립식과 집사임직식이 이어졌는데 이날 이진수 집사와 백형설 집사가 장로로 장립 되었다.
3차 건축위원회 구성
<추가 건물 구입자금 조성 기록>
• 1986년 4월 13일 각부서의 책임자를 선출하여 발표 했는데 그중 ‘교회건축위원회’ 위원장으로 문영조 장로가 임명 되었다. 같은해 6월 8일 문영조(위원장) 와 더불어 이진수(회계), 정용진, 김주학, 구우율 을 3차 건축위원으로 임명했다. 1986년 7월 6일 에는 주보를 통해 “본 교회는 교육관이 협소하고 친교실이 없어서 불편하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3차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노회 및 대회와 협의하여 총 $700,000의 예산규모로 새로운 교회건물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예산중 $100,000은 교인들의 건축헌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7월 27일에 건축헌금 약정액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공지했다.
• 1986년 7월 27일 2차 건축헌금 약정액은 목표액 $100,000을 훨씬 넘어 $133,940(66가정)이 되었다. 8월 3일에는 $141,940에 이르렀다. 9월14일에는 $152,040이다. 여기에 10월 26일에는교회 주차장에서 열린 ’여전도회 주최 교회건축을 위한 바자회’가 주차장에서 열렸는데 여기서 마련된 $21,366의 수익금을 모두 건축헌금으로 기증 하였다
• 건물 추가 구입
제3차 건축위원회가 구성되고1년5개월만인 1987년 11월 14일 현재의 예배당 서편에 위치한 건물을 추가 구입 한다. 새 건물은 영화사의 필름창고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대지 10,000sqft, 건물 9,800sqft로 당시 $600,000에 매입 하였다. 이 건물은 구입후 1988년 1월 3일까지 내부수리를 완료해서 친교실, 교육관, 사무실의 용도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