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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미국의 남북 전쟁을 전후하여 하와이의 사탕수수산업은 그 중요성을 더 해가고, 이에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이 산업을 확대하기 위해 처음에는 유럽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제일 먼저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880년대 부터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오기 시작했다. 그후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 정부와 지속적인 접촉을 가졌고, 드디어 1902년 11월 고종이 노동 이민을 허락 한 것이 한인 이민의 첫 시작이었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의 항구 도시 거리마다 하와이의 풍물, 작업내용, 미국 달러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포스터를 붙이고 노동자를 모집했다. 1개월에 16달러를 지급한다는 광고는 당시 대기근으로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던 조선 노동자에게는 일확천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최초로 121명이 인천항을 떠나, 1903년 1월 13일 개릭(Gaelic)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였다. 그 후 1905년 까지 65차에 걸쳐 7천명이 넘는 한국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미국 최초의 한인 이민교회
1903년 11월 10일, 하와이 오하우섬에서 미국 최초의 한인 이민교회가 탄생 했다. 현재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효시인 ‘한인감리교선교회’(Korean Methodist Church)가 이날 첫 주일 예배를 드렸다. 교회 설립은 안정수 윤병구씨 등 항일운동의 구심점인 ‘신민회’ 설립자들이 주도했다. 하와이 감리교회 선교부 조지 피어슨(George L. Pearson) 목사도 선교회 조직에 힘을 보탰다.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처음 미국령을 밟은 사탕수수 한인 이민자들이다. 최초의 한인 이민단은 전부 121명이었다. 대부분이 인천 내리교회 신도들이었던 이들은 1902년 12월 22일 신천지를 향해 인천항을 떠난다. 당시는 한국에서 하와이로 직접 갈 수가 없어서 일본 고베항을 경유한다. 이곳에서 종합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20명이 탈락하고 101명만이 고베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15명이 탈락하고, 최종적으로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아 이들이 최초 미국 이민단이 된다.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초기 사탕수수 이민자 중 절반 이상이 첫 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하와이에만 한인교회가 14개나 생겨났다. 당시 한인 교인 수는 402명. 그로부터 10년 후인1914년에는 하와이 교회 수가 39개로 늘었고 교인 수는 2,800명에 이르렀다.
한편, 하와이에서 군사력을 키우며 일제로 부터 무력으로 독립을 계획하던 박용만 선생은, 미국 유학후 L.A.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박사를 하와이로 초청한다. 이후 이들은 동지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독립 운동과 한국인의 교육, 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다. 동지회는 미주 각 여러 지역에 지부를 설치 하였고, 이를 통해 상해 임시 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왔으며, 일제 식민의 부당함을 알리는데 노력 하였으며, 이승만 박사가 설립한 한인 기독학원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동지회의 활발한 활동은 우리의 선조 이민자들이 사탕수수밭에서 피땀을 흘려 모은 돈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이민자들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2세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하와이 한인 상공회의소 편 ‘하와이 이민사’ 중에서>
하와이 한인 노동자들의 미국 본토 유입
하와이 이민역사가 시작된지 불과 5년후인 1910 대한인 국민회 인구조사를 보면 그동안 한국으로 돌아간 남자가 964명, 여자가 19명이고, 미국으로 이주한 남자가 1,999명, 여자가 12명, 사망자가 45명이니 하와이에 남아있는 동포의 수는 이민이 4,187명이고 하와이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107명 이었다.특히 1905년과 1907년 사이에만 무려 1,003명의 노동자들이 하와이 사탕 재배 농장을 탈출 하여 캘리포니아로 유입됬다. 1907년 에는 무려 1,000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했다.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서 캘리포니아로 유입되게 된 주 원인으로는 고된 노동과 노예에 가까운 처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또다른 요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사실은 본래 하와이에 온 중국인 이민자나 일본 이민자들은 농부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 이민자들의 직업적 배경은 매우 복잡한 것이었다.한국인 이민의 대부분은 도시의 일상 노동자들이었으며, 그밖에 구 한국 군인, 하급관리, 정치 망명자, 학생, 광부, 가정 사용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농민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극소수이고 도시적 직업을 가진 잡다한 사회적 배경의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탕농사와 같이 끈질긴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1907년 까지는 1,000명이, 1910년 까지는 2,000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서 미국 본토인 캘리포니아주로 유입되었다. 이렇게 미국 본토에 들어온 한국인들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와 샌 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중심으로 정착하여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70년사’ 중에서>
미국 본토 한인 교회의 역사
하와이에서 첫 주일 예배가 열린 지 꼭 4개월만인 1904년 3월 11일 미국 본토에 최초의 한인교회인 ‘나성한인 감리교회’(현재의 LA연합감리교회)가 세워진다. 그 다음 해인 1905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상항 한국인연합감리교회’가 설립됐고, 1906년에는 제퍼슨장로교회로 불리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1914년에는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 1919년 시카고한인감리교회, 1921년 뉴욕감리교회 순으로 세워졌다.
이 당시 한국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 이라는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면서 더욱 더 깊은 일제 식민지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