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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Archives: 설교 (page 5)

사랑 받았지만 슬픔으로 반응한 청년

2019년 7월 7일 주일예배 설교

본문 : 막 10:17-22
제목 : 사랑 받았지만 슬픔으로 반응한 청년
설교 : 김기대 목사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 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재구성

190630 기억의 재구성 Sermon

2019년 6월 30일 평화의 교회
설교: 김기대 목사
제목: 기억의 재구성
본문: 요한복음 21장 1절~14절

그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바닷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못 잡았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잡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서, 벗은 몸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배를 탄 채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1)백 자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 오너라.”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까이 와서, 빵을 들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또 생선도 주셨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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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부활 후 실의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방문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부활후 현현이 아니라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와 제자들의 이 만남에서 제자들은 그와 함께 하던 옛 사건들을 다시 기억해 냅니다.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던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과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아침 호숫가에서의 소박한 밥상은 오병이어의 사건도 기억나게 하고요. 예수는 이 만남을 통해 그들의 기억을 새롭게 직조하라고 침묵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거에만 매여있지 말고 이제는 삶의 자리에서 기억을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발터 벤야민이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를 해석한 것 처럼요.
지난 주간 우리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습니다. 6월 25일의 보수 언론은 6.25 69주년을 소환해내느라 애썼습니다. 어디선가는 모윤숙 시인의 ‘장엄한’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도 고교 졸업 후 처음 봤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판문점에서의 희망을 보았으니 롤러코스트 같은 지난 주간이었지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희생들이 폄하되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해방된 성령

190623 해방된 성령 Sermon

2019년 6월 23일 세대통합 예배
본문 : 사도행전 2: 1-13
제목 : 해방된 성령
설교 : 고주열 목사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였다. 그 때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와서 살았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 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서,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보십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일들을 우리 각자의 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소.”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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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예수공동체에 약속된 성령이 임재하셨다. 그런데 사도행전 기자는 성령의 출현을 방언의 사건으로 시작한다. 왜 방언의 사건으로 시작하고 있을까?

성령은 유대인들에게 친근한 존재이다. 바람, 하나님의 거룩한 영… 유대의 긴 역사속에 성령은 늘 유대종교 유대문화 유대땅 유대인들을 위한 존재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둘에게 당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성령의 임재는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유대적 언어로 전달되었고 크고 작은 전쟁과 수난속에서 위로와 회복의 영으로 유대인에게 임하셨다.

예수가 초대공동체에 성령을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 성령이 방언으로 나타나셨다. 그 성령을 기다린 자들은 유대인들이다. 그런데 유대언어가 아닌 이방의 언어로 임하셨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방언어로 나타난 성령!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완전히 바뀌었다는 상징적 사건이 바로 성령임재의 방언 사건이다. 더이상 성령은 당신의 구원사역을 위해 유대언어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다시말해 구원은 유대의 소유가 아닌 율법의 소유가 아닌 모든 족속과 나라와 사람들을 위한 구원으로 바뀌었다는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역사적 사건이다. 유대중심의 구원이 온 인류를 향한 구원으로 바꾸는 패러다임의 전환인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찬년전의 유대인들이 아닐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방언”의 소리를 들어야되지 않을까? 참 구원의 소리를 들려주시는 성령께 들을 귀 있는 자들이 되길 기도한다.

[‘해방된 성령’ 중에서]…

경계를 넘어서

190616 경계를 넘어서 Sermon

본문 : 욥기 38:1-11

그 때에 주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그 날 새벽에 별들이 함께 노래하였고, 천사들은 모두 기쁨으로 소리를 질렀다. 바닷물이 땅 속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구름으로 바다를 덮고, 흑암으로 바다를 감싼 것은, 바로 나다.
바다가 넘지 못하게 금을 그어 놓고, 바다를 가두고 문 빗장을 지른 것은, 바로 나다.

“여기까지는 와도 된다. 그러나 더 넘어서지는 말아라!
도도한 물결을 여기에서 멈추어라!” 하고 바다에게 명한 것이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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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이다. 삼위일체는 논리적 추론의 대상이 아니라 고백의 대상이다. 현대신학은 삼위간의 교제가 교회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주목한다. 삼위도 각각 개별 사역이 존재하는 동시에 경계를 넘어 교제하듯이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한다. 자신이 줄쳐놓은 경계를 과감하게 뛰어 넘으라.…

바벨

2019년 6월 9일 성령강림주일 설교
본문: 창세기 11:1-9
제목: 바벨
설교: 김기대 목사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주께서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주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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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묘호렌게쿄’라고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이 말은 나무묘법연화경의 일본식 발음이며 묘법연화경 즉, 불교경전인 법화경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이 주문을 외우는 일종의 종교인 창가학회 이야기가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언론을 통해 창가학회는 그냥 주문만 외우면 되는 종교, 우민 종교, 왜색짙은 종교로 대중들에게는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지금 창가학회 회관이 버젓이 자리잡고 있으며 언론으로부터 비난도 받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종교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창가학회는 1930년대 가치를 창조한다는 의미의 창가교육학회로부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교육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교육철학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2차 대전 중 구속되어 옥사하는데 일본의 군국주의와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에서 존경하는 일본 침략기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 가가와 도요히코 모두 국가주의자였습니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 두 사람을 존경하지만, 그들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와 달리 창가학회의 설립자는 일본의 폭력성과 맞섰습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기초로 평화를 강조하며, 여기 LA에서 멀지 않은 곳(Aliso Viejo)에 있는 Soka(창가) 대학은 미국에서 인문단과대학 20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평화학으로 유명한 학교입니다. 또한 창가학회는 일본의 공명당을 창당해서 자민당의 우경화 정책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일본의 이상한 종교 창가학회를 이야기하냐구요? 빨갱이 죽이자며 폭력을 선동하고, 평화정책에 시비를 거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남묘호렌게쿄를 주문으로 외우는 사람들보다 못하니 어디가서 그들과 같은 종교를 믿는다고 고개를 들 수 있겠습니까?

[목회서신 중에서]…

오늘의 여리고성

190602 오늘의 여리고성 Sermon

여호수아 6:15-20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번 도니 성을 일곱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 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찌니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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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은 모자를 그린 것이 아니었다. 내 그림은 코끼리를 삼키고서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 왕뱀을 그린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어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보아 왕뱀의 속이 보이도록 다시 그림을 그렸다. 어른들에게는 언제나 설명이 필요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보아뱀 속에 있는 코끼를 단번에 알아맞혔다. 어린 왕자는 사막에서 조종사를 만나기 전 이미 상당한 수준의 득도를 한 ‘어린 성자’다. 하지만 그도 모르는 것이 있다. 근 ㄴ보아뱀 속의 코끼리는 알아차렸지만, 정작 자기 별에 있는 장미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 주위에는 고작 한 번 깨달을 것으로 일평생을 우려먹으려는 사람이 있다. 속인들은 단 한 번의 각오로 깨달음을 완성하는 선사들의 세계를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선사들은 그 깨달을믕 ㄹ유지하기 위해 계속 정진한다. 한 번의 깨달음으로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한 번 깨달음으로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배 ‘서로가 증인 되어 주기’ 중에서]

작은 것이 아름다우려면

190526 작은 것이 아름다우려면 Sermon

본문: 마가복음 11:12-14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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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일본에서 미군들의 탈영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는 자텍(JATEC, 반전 탈영 미군 원조 일본기술위원회)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국계 미국인 김진수를 비롯한 6명의 탈영 미군을 탈출시킨 것을 시작으로 이어 3명, 4명을 스웨덴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본래 베트남전 참전 미군의 탈영을 돕던 몇몇 사람이 주축이 되어서 조직된 단체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데 있어서는 한국못지 않은 일본 입장에서는 이런 시민단체가 반가울리 없습니다. 특히 ‘탈영’이라는 불법적 행위를 돕는 것은 법의 논리와도 맞지 않기 때문에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도 환영받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국에서 자기 신념에 따라 군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은 진보 진영에서도 많은 것을 보면 자텍같은 운동이 얼마나 위험하고 외로운 운동인가를 짐작할 수 이 있습니다.

1923년 간토(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을 학살했습니다. 20가구 정도가 살던 마루야마에는 2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경단이 한 밤중에 조선인을 내어 놓으라며 들이닥치자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조선인에게는 손가락 하나 못건드린다며 총과 칼로 무장한 자경단 맞서 결국은 조선인 2명을 지켜 내었습니다.

나는 일본의 국가적 지향성은 싫어하지만, 이에 끌려다니지 않는 일본 시민들의 개인적 신념은 존경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의 강요로부터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는 것’ 이것은 좁은 길을 걸어가는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특히 한국처럼 집단적 사고가 강한 사회에서 우리가 신앙의 길을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살아가기

190519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살아가기 Sermon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의 결혼은 신화적인 표현입니다. 신적 가치관과 인간적 가치관이 혼인을 맺었을 때 우생학적으로는 네피림이라는 거인 용사 족을 낳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추악한 조합이었습니다. 결국 이 결함이 원인이 되어 노아의 홍수 사건도 있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포장될 때 네피림처럼 외양은 그럴듯하지만 속은 썩은 존재가 나옵니다.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기독교 기업으로 포장되는 경우, 자기 계발서 내용이 복음으로 변장하는 경우가 모두 여기에 해당됩니다. 뛰어난 철학자 에디트 슈타인은 유대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수의 길이 막혀 고뇌하던 차에 가톨릭에 귀의해서 봉쇄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갔을 때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또 그의 학문적 업적을 높이 산 동료철학자들의 구명운동이 있었지만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어린 아이를 대신해서 스스로 가스실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딸의 길을 선택 했습니다.

5.18 39주년입니다. 정치군인들의 권력욕이 같은 민족을 학살하고 강간할 때 그들은 인간이기조차 포기한 금수였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준 이들은 유명 목사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욕망을 억지로 결합시켰습니다. 가해자들은 그나마 재판에라도 섰지만 세상을 떠난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들은 아직도 원로행세를 하고 그 후예들과 어울려 다닙니다. 네피림같은 괴물들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일이 되고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데 협조하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예수를 마음에 담고 살 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입니다.…

Pay it Forward

대부분의 어머니 주일 설교 주제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과 그에 대한 자녀들의 기억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여성이 어머니는 아니며 어머니의 사랑이 항상 자애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성서 당시의 가족 윤리를 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자녀들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 존경받을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희생의 의미를 혈연 너머로 확장하자는 뜻입니다. 단순히 채무감으로서 pay it back의 효도가 아니라 외부를 향한 pay it forward의 가치관이 진정한 효도일 것입니다.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자를 장사지내게 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가족의 틀을 벗어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발언을 효에 맞추어 오늘의 본문을 억지 해석하는 것이 더 웃깁니다. 성서가 진보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뛰는 신예 피트 부티지지는 그의 진보적 신앙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그는 동성남편과 함께 유세를 하는데 성서가 자기를 진보적인 가치관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합니다. 성서 해석을 억지로 꿰맞추어 예수를 전통적 효도의 범위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은 명백한 왜곡입니다. 희생과 채무의 관계가 아니라 그너머를 향하는 가정 또는 사회를 예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190512 Pay it Forward Sermon

누가복음 9: 59 -60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욥이 자신을 벗어나다

190505 욥이 자신을 벗어나다 Sermon

욥은 잘못한게 없는데 하나님의 처사가 가혹하다며 항변하고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문제가 있다고 충고하는게 욥기의 구조입니다. 세상에 죄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따진다든가 죄없는 욥에게 가혹한 고통을 주는 하나님의 폭력성을 지적하면 욥기가 깔아놓은 ‘밑밥’만 보는 겁니다. 욥과 세 친구의 소득없는 공방이 오가던 중 욥은 타자에게 눈을 돌리며, 사회구조적 모순을 발견합니다. 그런 점에서 욥에게 가해지던 가혹한 고통들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욥이 겪어야 할 불편함 같은 것들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에만 갇혀있는 삶은 견딜 수 없이 불편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힘에 의해 발생하는 지구촌의 수많은 비극을 보며 불편해야 합니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현대인들이 타인의 고통도 미디어를 통해서 비디오 게임을 하듯이 소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을 미디어를 통해 보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사라진다는 말이지요. 아름다운 자연, 화목하고 풍요한 가정, 어린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 집에서 키우는 반려 동물들의 재롱 그런 것들만 보고 있으면 행복합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죄는 아니지요. 그런데 거기만 갇혀 있으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들을 타인의 고통의 자리로 초대해 그곳에서 깊은 교제를 나누시기 원합니다.

성경 본문: 욥기 24: 1-10

어찌하여 전능하신 분께서는, 심판하실 때를 정하여 두지 않으셨을까? 어찌하여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받을 날을 정하지 않으셨을까?
경계선까지 옮기고 남의 가축을 빼앗아 제 우리에 집어 넣는 사람도 있고,
고아의 나귀를 강제로 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부가 빚을 갚을 때까지, 과부의 소를 끌어가는 사람도 있구나.
가난한 사람들이 권리를 빼앗기는가 하면, 흙에 묻혀 사는 가련한 사람들이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가서 숨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들나귀처럼 메마른 곳으로 가서 일거리를 찾고 먹거리를 얻으려고 하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먹일 것을 찾을 곳은 빈 들뿐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남의 밭에서 이삭이나 줍고, 악한 자의 포도밭에서 남은 것이나 긁어 모은다.
잠자리에서도 덮을 것이 없으며, 추위를 막아 줄 이불 조각 하나도 없다.
산에서 쏟아지는 소낙비에 젖어도, 비를 피할 곳이라고는 바위 밑밖에 없다.
아버지 없는 어린 아이를 노예로 빼앗아 가는 자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이 빚을 못 갚는다고 자식을 빼앗아 가는 자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입지도 못한 채로 헐벗고 다녀야 한다. 곡식단을 지고 나르지만, 굶주림에 허덕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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